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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올린 백면금모구미에 한국 구미호에 대한 흥미도가 높다는 것을 감지, 관련글 올립니다.
사실 여우요괴 이야긴 한둘이 아닌지라 분류별로 나눠 약한 애들부터 천천히 올리려 했는데
기왕 일본한정 보스를 올린거, 한국에도 거의 비슷하거나 그 이상 등급의 여우설화 두개를 소개합니다.
#거타지 설화.
진성여왕 대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이다.
사신이 되어 당나라에 갈 때 후백제의 해적이 진도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궁사 오십 명을 뽑아
따르게 하였다. 배가 곡도에 이르니 바람이 파도를 크게 일으켜 여러 날을 묵게 되었다.
공이 이를 근심해서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섬에 신령스런 연못이 있으니 제사 지냄이 옳을 듯싶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연못 위에 제물을 갖추니 연못의 물이 한 길 남짓이나 높게 일어났다.
밤에 잠을 자는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했다.
“활솜씨 뛰어난 한 사람을 이 섬에 남겨두면 다시 순풍은 얻을 것입니다.”
공이 잠에서 깨어 이 일을 신하들에게 알리고는
“누구를 머물도록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나무 조각 오십 개에 저희들의 이름을 써서 물에 가라앉는 것으로 제비뽑는 것이 마땅합니다.”
공이 이를 따랐다. 군사 중에 거타지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물에 가라앉았다.
일행이 그를 남겨 두고 떠났더니 바람이 다시 홀연히 일어나서 배가 막힘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근심하면서 섬에 서 있었는데 홀연 한 노인이 연못으로부터 나왔다.
“나는 서해의 신이요.
매일 한 사미승이 해 뜰 무렵에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며 이 못을 세 바퀴 도는데,
그러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뜨게 되고 사미승은 내 자손들의 간장을 꺼내 먹어 버린다오.
이제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가 남았소. 내일 아침에도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가 제발 활로 쏘아 죽여주시오.”
거타지는 말했다.
“활쏘는 일은 제 장기입니다. 그렇게 해 드리지요.”
노인은 감사의 말을 하고 못 속으로 사라졌다.
거타지는 가만히 엎드려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이 밝아오니 과연 사미승이 와서는 주문을 전과 같이 외우고 물에 떠오른 늙은 용의 간을 취하려고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활로 쏘아 맞추니, 사미승은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물에서 나와 감사하다고 말했다.
“공의 덕을 입어 내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청컨데 제 딸을 아내로 삼으시지요.”
거타지는 “은혜를 입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진실로 바라던 바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한 꽃가지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는, 두 마리 용을 시켜 거타지를 사신의 배까지
데리고 가서 그 배를 호위해 당나라로 들어가게 했다.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배를 보니 두 마리 용이 이고 오고 있기에 이일을 상부에 알렸다.
황제는 “신라의 사신은 반드시 평범한 사람은 아니로구나.”라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아찬공을 여러 신하의
윗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내렸다.
신라에 돌아오자 거타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해서 함께 살았다.
- 진성여왕때는 이미 통일신라[사실 이 명칭은 진국=발해를 무시한 후대의 명칭이란 지적이 있어 별로 맘에 안듬. 대조영 무시당함]
후반기라 신라의 위세가 많이 약해진 때입니다. 서해의 용왕과 당나라. 그리고 거타지의 주인공 버프는 그런 배경에서
국가의 기상을 높여보고자 만든 설화란 느낌이 강합니다.
이 거타지 설화의 여러 요소는 후대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 설화로 계승됩니다. 하지만 거타지와 달리 용왕의 딸이 정체 들켰다고
나무꾼의 선녀처럼 이혼크리 던짐.
여기서의 여우요괴는 한국 특유의 분류fail덕에 구미호인지 꼬리가 몇개인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해용왕일가를 혼자서 바닷물에 말아드심.
사미승으로 변신했다기에 예전 노호정으로 소개한 신돈옹 첨부
# 원광법사와 삼기산의 흑여우산신.
수이전(琇異傳)의 원광법사전에서는 원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원광의 원래 성은 설씨로 경주 사람이다.
처음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서른에 삼기산에서 홀로 도를 닦으며 살았다.
4년 후 한 승려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절을 짓고 2년을 살았는데.
그는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워 주술을 배우기를 좋아했다.
원광이 홀로 앉아 불경을 외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신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의 수행이 좋구나.
많은 수행자들이 원칙대로 하는 이가 적은데 너는 그렇지 않구나.
지금 네 이웃에 있는 승려만 봐도 주술을 빨리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게 없을 것이며,
그 요란한 소리가 오히려 남의 고요한 생각을 괴롭히기만 한다.
게다가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이라 늘 지나다닐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다.
그러니 법사는 나 대신 그에게 말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하라.
그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가 죄업을 저지를지도 모르겠구나."
이튿날 원광이 이웃에게 말했다.
"내 어젯밤 신의 말을 들었다오.
신이 말하길 여기가 그 신이 다니는 길목이라 하오.
그러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을 듯하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따를 것이오."
그러자 승려가 대답했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 흘립니까? 법사는 어찌 여우의 말을 걱정하신단 말입니까?"
그러더니 끝내 원광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밤 또 신이 나타나 말했다.
"그래 승려가 무엇이라 하던가?"
원광은 신이 노여워할까 두려워하며 대답했다.
"아직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한다면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이 말했다.
"내가 이미 다 들었거늘 어찌 법사는 거짓말을 하는가? 그대는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게나."
그날 밤이었다.
갑자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원광이 이튿날 살펴보니 산이 무너져서 승려가 있던 절이 바위에 깔려 있었다.
신이 다시 와 말했다.
"법사가 보기에 어떠한가?"
원광이 대답했다.
"보기에 몹씨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또 말했다.
"내 나이가 3,000세요, 신령스런 술법도 가장 훌륭하니 이런 일쯤이야 아주 사소한 것이라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앞일도 내다보고, 온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다네.
그래서 말해 주는 것이니 잘 듣게나.
법사가 여기에만 머물면 비록 자기에게는 이로운 행실이 있겠지만,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야.
지금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않는다면 미래에 앞으로 성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네.
그러니 어찌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서 이 나라의 미혹한 무리들을 인도하지 않는가?"
원광이 대답했다.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고 싶지만, 너무 멀어 가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러자 신은 중국에 가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원광이 그 말에 따라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물면서 삼장에 널리 통달하고 유학도 배웠다.
그러다 진평왕 22년 경신년(600)에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 신라로 돌아왔다.
원광은 신에게 감사하고자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중에 신이 와서 원광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먼 길을 어떻게 왕복하였는가?"
"신의 큰 은혜로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계를 주겠네."
이에 세상에서 서로 구해 주자는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원광이 또 청했다.
"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법사가 내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내일 아침 동쪽 끝을 바라보게."
법사가 이튿날 아침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는가?"
"보았는데 매우 기이했습니다."
신의 팔뚝을 본 일로 그 산을 비장산(긴팔뚝산, 臂長山)이라고도 불렀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해도 죽음의 무상함은 면할 수 없으니,
나는 얼마지 않아 그 고개에 나를 버릴 것이네. 법사는 영원히 가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주게."
원광이 약속한 날에 가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었는데,
검기가 옻칠을 한 것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헐떡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원광(圓光, 542년 ~ 640년)은 신라 진평왕 시대의 유명한 승려이자 학자이다.
세속에서의 성은 박씨이다.
중국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이름이 높았던 원광은 신라로 돌아 온 후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 ·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하였다.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
진평왕 30년(608년)에는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金谷寺址 圓光法 師浮屠, 경북문화재자료 제97호)
- 3000년 내공이면 일본서 말하는 공호수준.....
원래 번개를 다루는 클래스는 동서양 막론하고 거의 다 신급으로 쳐줌. 아, 그냥 산사태일수도 있겠군요;;
해석에 따라선 위 이야기를 토속종교와 불교가 서로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사이가 되지만 결국 김유신과 천관녀 처럼
신종교의 융성과 구종교의 몰락을 의미한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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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키워준 신을 아프고 병들게 하고있죠.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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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키워준 신을 아프고 병들게 하고있죠. 지구 | 13.04.27 20:4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