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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1890년(고종 27) ~ 1923년
독립운동가
1919. 3.1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베려하는 일본군경을 저지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 자신이 보관
탈취한 검은 독립기념관에 현재 전시 중
1919. 12월 암살단을 조직
1920. 4월 동료들과 함께 전라도 지역을 돌며 수명의 친일파를 숙청
1920. 12월 의열단에 가입
1923.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투탄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1923.1월 13일 저녁에 남대문밖 삼판통 자기 누이의 집인 304번지에서 은거하며
사이토 총독의 암살기회를 엿보다 일본군경에 발각
은거지에서 수십명의 일본군경과 총격전을 벌여
당시 유도 사범이자, 간부형사였던 타무라를 사살하고
이십여 남짓을 상해를 입히고 탈주
남산인근 절로 숨어들어 승려로 위장한채 다시 기회를 엿보다
혁신단 시절 동지의 집에 다시 은거
1923.1월 17일
12일밤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의 출처를 일본경찰이 추적
결국 암살단의 비밀거처가 발각
이에 우에다,아마세 경부 지휘아래 20명의 무장경찰에게 비밀거처가 포위당하였다
김상옥 열사는 쌍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 및 이마세,우메다 경부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유유히 사라졌다
1923.1월18일
남산을 거처 금호동에있는 안장사에서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여
일본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 이후 거사작전을 펼치게된다
1923.1월 22일
최후의 거처가 발각되어
그 날 5시반경 경기도경찰부장 우마노(馬野)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藤本)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일본군경 천여명에 포위당함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일본 군경 400여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이때에도 쌍권총을 사용했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함.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고
당시 한국에 주둔해있는 일본입장에서 김상옥 의사는 괴담 그 이상의 존재였을겁니다
-BGM정보 Assassin's Creed III ost -17번 트랙 Fight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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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에 지금 필요한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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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키 제삿날에 모이는 산송장들에게 맞서려면 이분의 저 기념일에 우리도 가서 뭔가 해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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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십이일밤 여덟시 종로서 서편창에 폭탄을 던지어 큰 소리를 내고 폭발 십이일밤 여덟시 십분에 종로경찰서에 폭발탄을 던지다. 여덟시 십분에 종로서 서편 동일당 간판점 모퉁이 길에 서있던 사람이 경찰서 서창을 향하여 폭탄 한 개를 던졌는데 굉장한 소리를 내며 폭발하였다. 서편창을 파괴한 폭탄 파편이 행인 오명을 상해 폭탄이 파열되매 종로네거리는 물론 부근 일대에는 졸지에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은 물론이오 경찰서에 있는 숙직경관들은 대경실색하여 일변 활동을 개시 하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경찰서의 손해는 서편으로 난 유리창 두어 장이 깨졌 으며 폭탄이 터질 때 마침 동일당 골목으로 지나가던 행인 다섯명이 폭탄 파편 에 맞아 부상당하였다. 부상당한 남자 다섯 명은 맹리 신보의 사원이고 폭탄이 파렬할 때에 마저 부상 당한 사람은 전부 일곱명인데 중상자 부내홍 파동 칠팔 매일신보사 기계부원 홍인순(30) 장상용(26) 염창용(21) 경상자 부내 사직동 일이칠 매일신보사 기계부원 박봉환(27) 김영칠(23) 생원산월(18) 정하영(8) 7명중 남자 5명은 현장에 넘어진 것을 즉시 경찰서로 옮겨 응급치료를 하고 아이는 즉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소년군의 구호 활동/ 부상자를 응급구호 부상자들이 폭탄의 파편에 맞아 넘어지자 마침 종로를 지나가던 조선소년군의 조철호씨 외 2명이 이 광경을 보고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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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검사 어제 오전에 재차 현장을 점검 검사정(관직명)까지 출장 폭발탄이 터진 후 얼마 안있어 대원검사는 웅전 서기를 데리고 종로서에 출장하여 현장을 점검하였으나 원래 컴컴한 밤이라 강력한 전등을 가지고 현장을 두루 살폈으되 자세히 알 수 없어 어제 13일 오전 10시 경 시원 검사 정과 기타 서기가 다시 현장에 출장하여 모래 한 알도 빼어놓지 않고 자세히 조사하였으며 더욱이 폭발탄에 맞은 게시판을 일일히 자로 재고, 또는 깨어진 폭탄조각과 유리창 조각을 일일히 모으는 등 엄중하고 세밀하 게 현장을 조사하였더라 환산국장 종로서에 출장. 서장에게 진상을 들어 어제 13일 오전 10시경 환산경무국장은 자동차를 타고 종로경찰서에 출장 하여 폭발탄이 터진 동서 교통실의 전후좌우를 일일히 시찰하고 서장실에 들어가 서장의 전후경과의 사실을 보고받은 후 10시 반 경에 본부로 돌아갔 더라 "당시 광경은 모르겠습니다" 다리를 맞고 정신없이 하였다 가장 많이 다친 홍인순의 말 폭발탄을 맞은 매일신보사 사람 다섯 명은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증인 이라 하여 경찰서에서는 아직까지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동서 경무계에 두었는 데 그들은 대개 다리가 부상하여 걸을 수 없다하며, 그 중에 가장 중상을 당한 홍인순은 얼굴에 비참한 근심을 띄우고 당시의 광경을 말하되 "우리 다섯 사람 은 어디서 술을 먹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런말 저런말을 하며 무심히 종로 경 찰서 앞을 지나갈 때에 돌연히 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무슨 돌조각 같은 것들이 날아와 우리의 발목을 칩디다. 그때 정신을 잃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저히 알 지 못하겠고 정신없이 두 걸음 나가다가 그만 땅에 거꾸러 졌습니다. 그때 광경이라든지 또는 누구가 무엇을 던진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 습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습니다. 참말 우리의 신수가 사나웠습니다" 하더라 민심에 염려없다는 경찰부장 종로경찰서 폭탄 사건에 대하여 그저께는 물론이고 어제 아침 열시부터 동서 서 장실에 출장하여 만사를 의논중인 경기도 경찰부장 마야정일씨는 말하되 "나는 관사에 있다가 전화로 처음 사건을 알았습니다. 비록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 다 할지라도 민심은 그리 소동이 되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폭발탄은 벌써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민심이 너무 평온하기 때문에 일부 과격한 독립파 사람들이 어찌할 수가 없어서 최후수단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민심동요에 대해서는 근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상자들에게 대하여서 는 매우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이상 동아일보 1923년 1월 14일자(종로서 투탄의거 2일 후)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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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번호 벌레시키가 여기있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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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번호 벌레시키가 여기있네 ㅎ | 14.01.06 15: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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