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잠시 후 죽는다면..
다행히 그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식사를 한다면 맛을 느낄 수 있을까요??
사진작가 Henry Hargreaves의 컬렉션 "NO Second" 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한
사형수의 최후의 만찬을 찍은 작품입니다.
1. Ted Bundy
테드번디 (Ted Bundy, 1946.11.24 ~ 1989.1.24)
출생: 1946년 11월 24일 일요일
출생지: 버몬트 주의 버링톤
출생명: 디오도어 로버트 코웰 (Theodore Robert Cowell)
1970년대 미국을 경악시킨 열쇄살인사건의 주인공 <테드번디>.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범죄를 저지른 약 5년간 30 ~ 100여명의 여성으로 추측된다.
미국인들에게 '연쇄살인범'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테드 번디이며 이로써 그는 많은 헐리운 공포/스릴러 영화계에 모티브/영감을 주기도 했다.
예를들어 연쇄살인 영화하면 딱 떠오르는 "양들의 침묵" 중에서 한밤 중 차를 몰고 가던 여성에게 팔에 기브스를 하고 다가가 도움을 요청했던 살인마 '버팔로 빌'이 바로 테드번디에게서 따온 것이다.
아동기
미혼모로서 당시 22세의 나이로 엘레아노 루이즈 코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미혼모라는 인식과 아들을 키울 능력이 부족해서였는지 그녀의 친부모에게 아들을 맡기고 떠난다.
조부모 역시 이를 걱정하여 테드번디를 자기 아들처럼 키웠는데 번디가 워낙 영리하고 착하게 자라 그의 조부모는 테드번디를 유난히 귀여워하며 사랑했다.
그러다 1950년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워싱턴주 타코마시로 옮겨 함께 살게되었는데 그 당시 그의 어머니 루이즈 코웰은 조니컬 페퍼 번디라는 이름의 군대 요리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테드번디는 조니와의 결혼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그 결혼으로인해 그는 테드 코웰에서 테드번디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루이즈 코웰은 재혼 후 네 명의 다른 아이들을 낳았고, 테드는 그 아이들을 돌보느라 별로 남는 시간이 없었다.
당시 테드와 계부 사이엔 어떤 끈끈한 유대 관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목격자>라는 책에는 테드의 유소년기는 불행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부끄러움을 잘 탔고, 종종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청소년.청년기
어린시절 시애틀에서 자란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소심한 학생이었으나 이미 그의 한쪽에선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체인 톰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 청소년들이 그렇듯 다양한 성경험(성관계)을 했다.
ㅍㄹㄴ 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이에 끝나지 않고 잡지 속의 모델들을 ㅁㅁ하고 살해하는 망상을 꿈꾸었다.
크게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쪽에서 먼저 친구를 찾아다니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이성(여성)을 만나는것에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을 만나고 성관계를 가졌으나 적극적인 관계를 맺진 못했다.
또한 그는 ㅅㅅ보다 폭력적인 일에 더 관심이 많았고 쾌락을 느꼈던것 같다.
1965년 테드는 우드로우 윌슨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학위를 따기위해 퓌젯 사운드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심리학과 아시아학을 수강하다가, 겨우 두 학기를 채운 후에 시애틀에 있는 와싱턴 대학으로 전학했다.
1967년에 테드는 스테파니 브룩스라는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 만났다.
스테파니 브룩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 사귀며 친밀감을 느꼈고 이내 뜻이 통했다.
테드가 어떤 여성에게 친밀감을 느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 <내 옆의 낯선 사람>이란 책에 의하면 이때가 테드가 성적 행위에 연관된 최초의 시기라고 한다.
1968년 가을에 테드는 다시 캘리포니아 주의 팔로 알토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으로 이적했다.
그 직후 스테파니 브룩스는 와싱턴 대학을 졸업했고, 갑작스럽게 둘의 관계도 끝이 났다.
부유하게 자란 그녀이기에 목표의식 뚜렷한 성공 가능성이 있는 남성을 원했고 그에비해 테드번디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테드는 첫사랑을 잃어 상심했고, 다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성적도 떨어져서 그는 할 수 없이 학교를 자퇴하기로 결심한다.
테드는 다시 자신의 인생을 정상궤도로 올려 놓으려고 애쓰면서 지방을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1969년 테드번디는 버몬트에 위치한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 이르렀고 거기서 테드는 자신의 출생기록을 살펴보다가 또 한 번 더 가슴 쓰린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누이가 진짜 엄마였고, 현재의 엄마가 실제로는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자신의 누나가 사실은 어머니이고 부모라고 믿었던 사람이 조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심리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첫사랑-어머니-할머니, 테드에게서 이들 세 여자는 자신의 심리적 고통의 원인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에게 느끼는 자신의 성적 욕망과 여자에 대한 증오심 사이에서 테드는 인격의 균열이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는 특히 어머니를 유달리 증오했고 여성에 대한 존재가 부정적이고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되었을것으로 판단되며 그 안에서 존재한 검은 그림자가 깨어나게 된것이다.
1969년 가을 테드는 와싱턴 대학에 재입학하여 모든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테드는 첫사랑을 되찾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청년이 되었다.
그렇지만 스테파니는 그에대한 어떤 흥미도 없었다.
여기에 기죽지 않고 테드는 열심히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선거 운동을 뛰어다니며 지방 정치에 점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남는 시간도 아까왔던지 테드는 시애틀 클라이시스 병원에서 전화 봉사 활동을 했으며,
거기에서 테드는 얼마 안 있어 앤 룰이란 여자와 친해졌는데, 그녀는 수년 후에 <내 옆의 낯선 사람>이란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쓴 장본인이다.
또한 그곳에서 비서로 일하던 멕 앤더스라는 이혼녀도 만났다.
둘은 이내 데이트를 시작했고 앤더스는 얼마 후에 깊은 사랑에 빠졌다. 테드는 그녀에게 깍듯하게 대해 주었고 그녀의 어린 딸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무관심하게도 테드는 앤더스와 결합해 정착할 의사가 없었고,
앤더스 모르게 편지와 전화로 첫사랑 스테파니와 계속적인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후 2년간 테드는 정치 운동을 했으며 여러 법률 학교 수업을 들었다.
테드가 익사 직전의 세 살난 꼬마애를 구해줘 시애틀 경찰서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은 것도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 전도양양한 미래를 꿈꾸며 테드는 1973년 여름 와싱턴 대학을 졸업했고 이내 유타 대학 법률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앤더스와 지속되는 관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와싱턴 주 공화당 정치 운동 때문이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 다음해까지 테드는 유타 대학에 출석하지는 않았다.
공화당 업무차 여행을 하는 중에 테드는 옛날의 로맨스를 기억하며 스테파니와 다시 만날 결심을 했다.
새로워진 테드는 스테파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다시 한 번 사랑의 불길이 불붙었다.
두 사람은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함께 하는 많은 시간을 보냈고, 결혼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누었다.
반면에 이혼녀 앤더스는 테드가 비밀스럽게 스테파니를 만나고 다닌다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는데, 테드는 스테파니와 뜨거운 재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 이혼녀를 향한 사랑을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스테파니는 테드가 이제는 자신이 꿈에 그리던 남자로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열어가는 미래를 희망하게 되었다.
이 두 여자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동안 불행히도 테드가 마음에서 겪고 있는 '변형' 또한 알지 못했다.
테드는 조용히 각각의 희생자들은 치밀하게 선택되었고 스테파니의 호리호리한 몸매와 헤어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을 목표로 삼았다.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지만 보통은 자제심을 발휘하게된다.
하지만 테드번디는 그런 자제심이 부족했고 언제부턴가 이로인해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시작했을것이다.
그가 다 성장하여 법률공부를 선택하고 이를위해 솔크레이크 시로 이주,
테드 번디는 잘 생긴 청년으로 사건이 발생할 무렵 미국 솔크레이크 시(市)에서 법률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그가 이러한 살인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촉망받는 변호사나 검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테드 번디는 엘리트 청년으로 주위에 평판이 좋았고 머리도 수재였다.
번디는 매력적인 법대생이었다. 그는 옆집 이웃이었고 이웃의 소년이었다.
범죄자의 시기
테드번디는 관음증을 즐겼다.
여자들의 집앞을 서성거리며 여자들이 옷을 벗는 것을 훔쳐보며 ㅁㅁ하는 망상을 즐겼고 결국 범죄자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훔쳐보는걸로 시작하여 여자들의 자동차에 다가가 타이어에 바람을 빼거나 간단한 부품을 조작한 다음 몰래 숨어서 여자의 반응을 살피는 비교적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커다란 쾌감을 주지 못했고 결국, 번디는 여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동전을 줍던 여자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비명을 질러댔고 테드번디는 당황하여 그 자리를 서둘러 도망쳤다.
경험부족에서 일어난 실패...이런 시행착오 끝에 그는 점차 대담하고 과격해진다.
1974년 1월 4일 18살의 소녀 조니 렌츠의 방으로 그는 들어간다.
조니는 시애틀에서 여러 명의 룸메이트와 커다란 집을 함께 쓰고 있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조니가 아침 식사 때 내려 오지 않는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의심조차하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낮에 가까워지자 친구들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그녀의 방으로 갔다.
조니는 자고 있는 듯이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조니가 흥건한 핏물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은 경악했다.
이불보를 끌어내렸을 때 그 상황은 침대 옆 난간에서 부러진 막대기가 조니의 음부 깊숙이에 쑤셔 박혀 있는 것으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니는 아직까지도 숨이 붙어 있는듯 보였고 친구들은 재빨리 응급실과 경찰에 연락했다.
구급 의료 요원이 도착했을 때 조니는 뇌사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폭행 후에도 살아 남았다.
그로부터 4주후, 테드의 다음 피해자는 린다 앤 힐리였다.
그녀는 21살로 와싱턴 대학 법률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자 일기예보 아나운서였다.
린다 할리는 현관문을 열어 놓은채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그 집을 우연히 지나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목을 졸랐다.
린다 할리는 맹렬하게 저항하면서 발버둥을 쳤으나 이내 혀를 길게 빼어 물고 축 늘어졌다.
곧장 그는 그녀를 자신의 폭스바겐에 태우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옷을 벗기고 성폭행했다. 이어서 그는 린다 할리를 살해하고 시체를 버렸다.
린다 할리를 성폭행하고 살해하면서 테드번디는 그 여자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린다 할리를 다만 여자, 자신의 망상을 실행하는 도구로만 생각한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고귀한 생명체나 인격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성욕을 해소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잔인한 짐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74년 1월 31일, 린다의 룸메이트 한 명이 린다가 아직 직장에 출근하지 않았다는 직장 상사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룸메이트는 린다의 지하실 침실로 갔다. 침대는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고 그녀의 자전거는 구석에 놓여 있었다.
밤이 되어도 아무도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걱정하던 부모는 경찰에게 딸의 실종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사의 한 순서상 경찰은 형식적으로 린다의 방을 조사했다.
경찰관 한 명이 마침내 침대보를 벗겼을 때 베갯잇과 시트가 피에 흠뻑 젖어 있는 광경을 보고 기겁했다.
경찰관들은 이내 린다의 잠옷을 찾아냈고 그 옷의 네트라인에는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 경찰관들은 이 핏빛 현장의 주인공의 사체와 그 내막을 암시할 만한 단서조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로인해, 그 지방 경찰관들이 부지런히 린다와 그 범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가운데서도
테드는 자신이 잡힐 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일상 생활에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테드 번디는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며 여자들을 유혹했다.
그가 유혹한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나이 어린 소녀들이라는 것은 그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 폭력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사건을 저지르고 얼마지나지 않아, 1974년 2월 테드번디는 특별한 이유없이 결혼이야기까지 오고가던 스테파니와 이별을 한다.
수년전 첫사랑 스테파니가 자신을 걷어찼던 것처럼.. 그리고 그이후 스테파니는 테드를 만나기는커녕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내 생각이지만 테드번디는스테파니를 굉장히 사랑하고 증오했을것이라 생각된다.
증오했기에 어쩌면 스테파니를 자신을 버린 어머니 루이즈 코웰과 동일시! 그리하여 그녀와 닮은 젊고 여린 여성을 타겟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그녀를 사랑했기에 스테파니를 죽이지 않고 그녀와 헤어진것 같다. 아마 이때가 인간적이고 신사적인 테드번디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 때를 기점으로 그의 ㅁㅁ과 살인은 계속된다.
하루에 두 여자를 폭스바겐으로 유혹하여 납치한 적도 있었다.
1974년 8월 삼마미쉬 호수로부터 대략 6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와싱턴에서 싸늘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는데 두 피해자는 꼭지 돌아간 광란의 ㅅㅅ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살해당한 듯이 보였다.
이때 테드는 한 여자를 납치한 뒤에 다른 여자를 납치하여 첫 번째 여자 앞에서 능욕한 뒤에 살해했다.
이 실종 사건을 통해 사건의 의미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장에는 증거가 없었지만,
와싱턴과 오레곤 주 살인 사건 사이에 보이는 유사점들이 곧 유타 주 수사관들의 관심을 끌었다.
세 개 주 수사관들은 합동으로 조사를 벌여 나가게 되었고 이윽고 이 모든 살인은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라는 데 결론을 맞췄다.
테드 번디는 여러 가지 방법(특히, 깁스를 하여 여성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여자들을 납치했지만 결말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종자들은 모두 호리호리한 백인 여자에 머리 중간쯤에 가름마를 탄 머리를 하고 있었고 모두 저녁 시간에 실종되었다.
실종 사건 수사가 강화되자 사건이 일어나던 시간에 폭스바겐을 운전하며 팔이나 다리에 깁스를 한 잘 생긴 남자가 목격되었다는 정보가 차례차례 입수되었다.
그 의문의 사나이가 접급했던 여자들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테드라고 밝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정도로 테드가 매혹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74년에서 1975년 8월까지 미국의 유타주에서는 약 8건의 ㅁㅁ살인사건이 발행했다. 경찰은 바짝 긴장했고 미국은 공포에 떨었다.
유타주에 이어 워싱턴주에서도 ㅅㅅ와 관련된 연쇄살인사건이 잇달아 발생했고 몇 번인가는 여자를 유혹하려는 순간에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다.
1974년 11월 8일, '캐롤 다론치'는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하다가 잘 생긴 청년의 유혹을 받았다.
그녀는 그의 폭스바겐까지 동행했다. 그러자 테드 번디가 수갑을 채우고 연장으로 머리를 때리려고 했다.
캐롤 다론치는 비명을 지른 뒤에 수갑 찬 손으로 차문을 열고 달아났다.
경찰은 폭스바겐을 운전하는 남자가 솔트레이크시의 어느 쇼핑몰에서 18살의 캐론 다론치라는 소녀를 납치하려고 했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어렵사리 그를 잡을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잡았다.
그 젊은 여자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고 형사들에게 납치범의 인상착의와 차에 대해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솔트레이크시의 수사관들이 그 용의자를 찾는 동안에 유타 주 바운티 당국은 17살의 데비 켄트가 고등학교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한 목격자가 그 학교 주차장에서 황갈색 폭스바겐 차가 재빨리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살인은 넉 달 동안 주춤하다가 콜도라도 주에서 적어도 네 명의 여자가 실종되면서부터 다시 재개되었다.
약 한달 후, 실종된 여자들 중의 하나가 실종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피해자는 성폭행을 당했고 뭉툭한 둔기에 의해 살해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어 와싱턴에 있는 테일러 산맥은 그 살인자가 애용하는 매장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하나하나씩 여러 명의 여자들 유해가 발견되었으며 그들 중 하나는 나중에 21살의 린다 앤 힐리로 신원이 밝혀졌다.
1975년 8월 16일, 경찰은 유타주의 고속도로 순찰원이 폭스바겐을 몰고 있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여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순찰원이 번호판을 보려고 불을 비출때쯤 그 운전자는 도망치고 있었다.
추적 끝에 몇 블록을 가지 못하여 폭스바겐은 도로 옆에서 정차당했고
운전자에게 신분증을 요청하자 그는 디어도어 로버트 번디라는 이름이 적힌 운전면허증을 꺼내 주었다.
운전자가 수상쩍다고 생각한 경찰은 차를 조사하였고 그 안에서 한 쌍의 수갑, 기다란 끈, 쇠지레, 스키 마스크, 얼음 송곳과 나일론 스타킹을 찾아냈다.
희대의 살인마 테드 번디가 그 자리에서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테드 번디는 기소되었다.
그는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해박한 법률 지식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미국인들, 특히 배심원들은 그의 뛰어난 말솜씨에 감탄했다.
체포된 테드번디와 납치 미수 캐롤 다론치 사건의 용의자 사이의 유사점을 알아채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캐롤 다론치가 그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관들은 혐의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더 필요했다.
테드는 납치 미수와 살인에 대해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지만,
경찰은 그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용의자의 배경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여러 주일에 걸쳐서 삼마미쉬 호수의 목격자들이 불려 와서 팔이나 다리에 깁스를 한 채 그 지역을 배회하며 테드라고 밝힌 남자가 용의자와 일치한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테드의 아파트를 수사하는 과정 중에 수사관들은 깁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인 석고반죽을 찾아냈다.
게다가 테드가 여러 피해자 시신이 발견된 테일러 산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피해자들 몇 명이 처음으로 실종된 마을들에서 가스를 구입하는 데 신용 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속속들이 밝혀졌다.
테드에게 불리한 증거들이 쌓여 갔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1976년 2월 23일 테드가 납치 미수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수사관들은 그를 살인사건과 연관지으려고 노력했다.
테드와 사귄 여성이자 그를 알고 있었던 베스트샐러 작가 앤 룰이 쓴 <내 옆의 낯선 사람>이란 책에 따르면 항상 공손한 자세와 잘 생긴 외모로 매력을 발산했던 29살의 테드는 유타 법정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동요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게 씌여진 혐의 때문에 심한 공격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일부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의 물결로 넘실거리게 만들었다.
테드는 납치에 실패한 다론치를 만났다는 사실조차 부인했지만
납치가 벌이진 시간의 행적에 대한 뚜력한 알리바이를 제시하진 못했다.
테드는 혐의 사실을 벗어 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지만 법정은 납치죄를 인정하여 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1976년 10월 22일,
콜로라도 경찰은 테드에게 23살의 카린 캠벨 살인 혐의를 추가 걸었다.
ㅁㅁ당하고 구타당한 시신이 1년 전 2월 17일에 발견되었고 경찰측은 테드가 그 범죄와 연관지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77년 4월, 테드는 콜로라도의 가필드 카운티 감옥으로 이송되어 그 해 11월 14일 캠펠의 살해 혐의로 예정된 공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다른 재판을 견뎌내고 싶지 않았고 탈옥을 계획한다.
1977년 6월 7일, 아스펜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던 테드는 감시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그는 훔친 차를 타고 마을을 벗어나려고 하다가 8일 만에 다시 붙잡혔다.
그후 거짓 7개월 후 무렵인 12월 30일 테드는 재탈출을 감행했다.
탈옥을 준비하는 동안 번디는 거의 먹지 않으며 자신의 체중을 14킬로그램 정도를 줄였다.
독방 천장에 전기비품 설치차 뚫어놓은 작은 구멍을 통해 빠져나갈 셈이었다.
천장 안으로 들어가 환기통을 통해 전진하여 간수가 사용하는 방의 벽장 속으로 숨어 들었다.
거기서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문을 통해 빠져 나왔다.
탈옥 사실은 15시간 후에야 드러났고 테드는 그 시각 시카고로 가서 플로리다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미국은 경악했으나 희대의 살인마 테드 번디는 검거되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난처한 지경에 빠져 들었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다음해인 1978년 1월 13일까지 테드는 따뜻한 남쪽 지방인 플로리다의 탤러해시 지역의 플로리다 주립 대학 근처에서 아파트를 얻어 살아가고 있었다.
생활은 좀도둑질로 때울 수밖에 없었고 그 지역에선 크리스 하겐이란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외모를 바꾸기위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목격자>라는 책에 보면 이 기간 중에도 테드는 새로 얻은 자유가 그닥 못마땅한것 같고, 이제는 살인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978년 1월 14일 토요일 밤에 치 오메가 여대생 기숙사에 침입하였다.
피해자들의 방에 몰래 들어가 실신할 때까지 곤봉으로 때리는 방법으로 한 번에 4명의 여자들을 차례차례 폭행했다.
한 여생은 구타하다가 옷을 벗긴 뒤에 능욕을 하고 이빨로 온 몸을 물어뜯었다. 다른 여학생은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두 여학생은 숨졌으나 두 여학생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당시 해부를 담당한 검시의가 생생한 증언을 말해주었는데, 피살자 가운데 한 명은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ㅁㅁ당한 다음에 목졸렸으며 피살자의 엉덩이와 젖꼭지에서 이빨로 문 자국을 발견했다고 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한 여성은 헤어스프레이 금속깡통으로 성폭행당했음이 추가로 증명되었고 다른 이 역시 곤봉으로 구타당했고 목이 졸렸다 했다.
여학생 기숙사를 나온 테드 번디는 근방에 있는 다른 여학생의 집을 습격했다.
여학생이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곤봉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여학생은 두개골이 부서져 죽었고 그때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테드 번디는 현장에서 달아났다.
그리고 이제 테드는 재범하는 데까지 채 한 달도 기다릴 참을성이 없었다.
1978년 2월 9일, 12살의 킴벌리 리치 소녀 실종 사건이 부모에 의해 접수되었다.
민첩하게 경찰은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실종자의 위치를 파악해 내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다.
킴벌리의 실종 6일 후,
펜사콜라주의 한 경찰관은 주거지역을 순찰하다가 오렌지색 폭스바겐을 타고 주택지역을 살펴보는 한 사내를 보았다.
요식 절차상 경찰은 번호판을 확인하다가 그것이 도난 차량임을 알게 되었고 경찰관은 재빨리 라이트를 켜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용의자는 도망치다가 얼마 못가 길 한켠으로 정차당했다.
경찰관은 운전자를 차에서 나오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경찰관이 수갑을 채우려고 했을 때 용의자와 짧은 몸싸움이 이어졌고 용의자는 도망치려 했다.
경관은 총 한 방을 쏘았고 용의자는 땅에 쓰러졌다.
경관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용의자는 튀어올라 공격해 왔다. 또 짧은 몸싸움이 일어났지만,
이번엔 경관이 용의자를 제압 수갑을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테드 번디는 훔친 차를 가지고 다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매혹적인 말솜씨로 자신이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치과의사가 희생자의 둔부에 있는 이빨 자국과 번디의 이빨 자국이 동일하다는 감정을 하는 바람에 유죄가 인정되어 10년에 이르는 항소 소동도 소용 없이 1989년 1월 24일에 사형을 당할것을 선고 받았다.
테드 번디는 사형이 확정된 뒤에 '톰'이 범죄를 지시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을 주장하는 범죄자들은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인격체가 저지른 범행을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대부분의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 소유자들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인격체를 인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89년 1월 24일 테드 번디는 전기의자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테드 번디가 체포될 때 살인사건을 총지휘했던 로니 앤더슨 형사는 테드번디의 차를 사서 창고에 보관하다 1997년 테드번디의 폭스바겐을 경매에 붙이는 바람에 그 사건을 기억하는 온 미국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테드 번디 살인사건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살인광들의 상투적 특성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범인이 무지막지한 살인마가 아니라 법률에 해박한 수재이고 엘리트적인 청년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는 공화당에서 그를 고용한 적이 있을정도로 사회의 주류 문화에 속해 있었다.
공화당 안에서 테드는 눈부시게 활약했고 교활할 정도로 영리한 인간이었으며 붙잡혀 들어간 감옥을 2번씩이나 탈출하는 성공 기록도 있다.
법정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살인마 이전에 전형적인 미국의 인텔리였고
그의 사건보도는 버라이어티쇼가 되어 사형 당할 날을 기다리며 독수공방하는데도
수많은 여성들의 팬레터와 결혼신청이 쏟아졌으며 급기야 테드번디는 옥중에서 자신의 팬과 결혼한다.
이 사건에서 악마는 우락부락한 범죄형이 아니라 천재형의 부드럽고 미남형의 얼굴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교훈을 남겼다.
한가지 흥미로운것은 형사들은 테드 번디 사건에서 희생자의 둔부에 있는 치열을 채취하는데 성공하여 그를 기소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지금으로서는 간단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과학수사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살아생전에 있었던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 소름끼친 고백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2. Rickey ray rector
3. Allen Lee
4. Angel Nieves diaz
이 사람 식판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지막까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 했다는군요..
5. Stephen Anderson
6. John Wayne Gacy
존 웨인 게이시(John Wayne Gacy Jr., 1942.03.17~1994.05.10)는 미국의 연쇄살인자였다.
그는 1972년과 1978년 사이에 저지른 것으로 밝혀진 총 33건의 소년 ㅁㅁ 및 살인 사건에 대한 범행을 자백하였으며 그로인해 사형되었다. 피해자중 27인의 시신은 그의 집 마루 밑에서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시신들은 인근 지역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게이시는 ‘광대 살인마(Killer Clown)’ 라는 별명으로도 악명을 떨쳤는데, 이는 그가 ‘광대 포고(Pogo the Clown)’라는 이름으로 종종 아이들과 이웃들을 위한 공연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게이시는 미국 일리노이(Illinois) 주 시카고(Chicago)에서 기계 관련 일을 하는 아버지 존 웨인 게이시 시니어(John Wayne Gacy Sr., 1900.06.20~1965.12.25)와 어머니 마리온 일레인 로빈슨(Marion Elaine Robinson, 1908.05.04~1989.12.14)의 세 자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지역 결혼 기록에는 그의 어머니 이름을 ‘마리온 E 로빈슨’으로 기록하고 있다. 게이시는 폴란드 및 덴마크 계 혈통이었다.
게이시는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그를 학대하며 종종 ‘계집애같은 녀석’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신 누이들, 그리고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다. 이들은 그를 ‘조니(Johnny)’라고 불렀다.
게이시는 11세가 되던해 이마에 타박상을 입었다. 이때 가해진 충격으로 혈종이 생겼지만 16세가 되어서 일시적인 시각 상실이 잦아지면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증상 치료를 위하여 약물치료가 이루어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게이시는 고학년이 되기 전에 중퇴하고 가출하였다. 네바다(Nevada) 주 라스베가스(Las Vegas)에서 돈을 모두 소진한 그는 그곳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그는 고등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노스웨스턴 비즈니스 칼리지(Northwestern Business College)에 들어가 과정을 수료하였다. 눈-부시 제화(Nunn-Bush Shoe Company)에서 견습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게이시는 1964년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동료직원 말린 메이어스(Marlynn Myers)를 만나 그해 9월 결혼하였다. 그는 스프링필드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청년상공회의소에 나가 1965년에는 부회장에까지 올랐다.
게이시의 처가는 여러개의 KFC(Kentucky Fried Chicken) 매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중 아이오와(Iowa) 주 워털루(Waterloo)의 매장 관리일을 맡겼다. 게이시는 이를 받아들이고 스프링필드에서 워털루로 이사를 갔다.
게이시는 워털루에서 지내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게이시는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도 다시금 이곳의 청년상공회의소에 나갔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점차 퍼져나갔지만 그는 열심히 활동하여 1967년 워털루 청년상공회의소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워털루의 청년상공회의소는 매춘과 ㅍㄹㄴ, ㅁㅇ 사업과 연계되어 있었고 게이시는 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게이시는 아내에게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었으며 지하실에 클럽을 열고 워털루의 소년들을 끌여들여 술을 마시게 하고 이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였다.
게이시의 이러한 이중생활은 1968년 3월 16세와 15세 소년 두명이 그를 성추행 혐의로 기소하면서 흔들렸다. 게이시는 무죄를 주장하여 재판에서 승리하는듯 보였지만 같은해 8월 소년 하나를 매수해 기소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려던중 소년이 붙잡혀 모든 것을 자백하면서 체포되었다. 10년 형이 구형되었으며 게이시는 아이오와 주 교도소(Iowa State Penitentiary)에 수감되었다. 게이시가 수감되자 그의 아내는 여러차례 이혼을 요구하여 1969년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게 되었으며 게이시는 이후 자신의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같은해 크리스마스에는 그의 아버지가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게이시는 1970년 수감생활 18개월만에 가석방되었고, 일리노이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범행 사실을 철저히 감춘채 게이시가 새로 얻은 일은 시카고 식당의 주방장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도움을 얻어 1971년 시카고 북서쪽 8213 웨스트 서머데일(West Summerdale)에 자신의 집을 장만하였는데, 집 마루 밑에는 4 피트 깊이의 공간이 있었다.
1971년 2월 12일 게이시는 소년 ㅁㅁ 미수 혐의로 재판장에 섰지만 소년이 출석하지 않아 무효가 되었고, 1972년 6월 22일에는 다른 소년이 게이시가 가짜 보안관 뱃지로 유인해 차에서 ㅁㅁ하려 했다고 주장하였지만 마찬가지로 무효가 되었다.
1972년 6월 게이시는 십대 시절부터 알고지낸 캐롤 호프(Carole Hoff)와 결혼하였고, 호프는 두 딸을 데리고 게이시의 집에 들어갔다. 게이시는 1975년 PDM 토건(PDM Contractors)을 설립해 건설 일을 시작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부부관계가 악화되었다. 게이시의 부부 성생활은 중단되었고 그는 종종 늦게 나가 외박을 하였다. 아내는 젊은 남자 신분증이 든 지갑이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였으며 게이시는 게이 ㅍㄹㄴ를 집에 가지고 들어왔다. 게이시의 두번째 결혼은 1976년 결국 파경을 맞았다.
게이시는 지역 민주당(Democratic Party)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청소 자원봉사로 시작된 활동은 1975년과 1976년을 거쳐 구역장 자리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이 직위에 있는 동안 1978년 5월 6일 열린 폴란드 제헌절 퍼레이드(Polish Constitution Day Parade)에 참석한 영부인 로잘린 카터(First Lady Rosalynn Carter)와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당시 영부인은 사진에 ‘To John Gacy. Best Wishes. Rosalynn Carter’ 라고 썼다. 게이시는 그해 퍼레이드를 감독하였고, 사진상에서 미국 정보부에서 검증한 안전한 인사라는 표식을 달고 있었다. 훗날 가택수사가 이루어졌을때 발견된 이 사진은 미국 정보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75년 7월 게이시의 직원중 한명이었던 존 버코비치(John Butkovich)가 실종되었다. 버코비치는 급료 문제로 게이시와 다툰 후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버코비치의 부모는 경찰에게 게이시를 수사해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1976년 게이시의 다른 직원 그레고리 가직(Gregory Godzik)이 실종되었고 그의 부모 역시 아들이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게이시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였지만 버코비치 때와 마찬가지로 단서를 찾지 못하고 미결로 남았다. 경찰은 게이시를 추적하지도 그의 범죄기록을 조사하지도 않았다. 1977년 1월에는 버코비치, 가직, 그리고 게이시의 지인인 존 스직(John Szyc)이 실종되었다. 같은해 말 게이시의 직원 하나가 주유소에서 가솔린을 훔치다 체포되었는데, 그가 범행당시 몰고 있던 차가 스직의 것이었다. 게이시는 스직이 실종되기 전에 차를 그에게 팔았다고 하였으며 경찰은 더 이상의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게이시의 범행대상이 전부 살해된 것은 아니었다. 1978년 3월 게이시는 제프리 릭널(Jeffrey Rignall)을 자신의 차로 유인해 마취제로 의식을 잃게한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ㅁㅁ하고 학대한뒤 링컨 공원(Lincoln Park)에 버렸다. 그러나 릭널은 의식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검은색 올즈모빌(Oldsmobile) 자동차와 케네디 고속도로(Kennedy Expressway), 그리고 8213 웨스트 서머데일로 가는 경로의 몇 개의 도로들을 기억해냈다. 경찰은 현상수배를 통해 7월 15일 게이시를 체포하였다. 릭널 건으로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12월 한 19세 청년이 게이시가 자신을 권총으로 위협해 성추행하였다며 고발하였지만 시카고 경찰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1978년 12월 11일 15세 소년이었던 로버트 피스트(Robert Piest)가 방과후 일하던 데스 플레인즈(Des Plaines) 약국에 다녀오던중 실종되었다. 실종되기 전 피스트는 약국 동료에게 일자리를 찾기 위해 건설회사들을 좀 찾아볼 생각이라고 하였다. 게이시는 당시 약국에서 약국 주인과 건물 리모델링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데스 플레인즈 경찰이 게이시의 집에 찾아와 수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게이시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데스 플레인즈 경찰은 시카고 경찰과는 달랐다. 그들은 게이시의 범죄 기록들을 조회하였고 그가 이상성욕자로 기록된 내용을 찾아냈다. 12월 13일 게이시의 자택에 대한 수색이 실시되면서 경찰은 1975년도 고등학교 반지, 게이시의 것이 아닌 운전면허증, 수갑, 주사기, 게이시에게 맞지 않는 옷가지류, 그리고 피스트가 일했던 약국의 사진과 같은 의심스러운 것들을 발견했다. 또한 수색중 경찰은 집안 마루밑에서 악취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데스 플레인즈 경찰은 가직이 실종상태임을 알아냈다. 그의 집에서 나온 반지는 스직의 것이었다. 게이시의 이혼한 두번째 부인으로부터 버코비치에 대한 이야기도 알아냈다.
1978년 12월 21일 게이시의 직원중 하나가 그가 30 건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했다며 제보해왔다. 경찰은 ㅁㅇ소지 혐의로 게이시를 체포해놓고 그의 가택을 다시 수색하였으며, 그의 집 마루 밑에서 인골을 찾아냈다. 추궁을 받은 게이시는 자신이 25~30 건의 살인을 저질렀으며, 사체 대부분을 자신의 집에 묻었다고 하였다. 또한 마루 밑에 더 이상 공간이 없어지면서 피스트를 비롯한 다섯 구의 사체를 데스 플레인즈 강 I-55 교량 밑에 유기하였다고 자백했다. 이 과정에서 게이시는 경찰에게 집안에 사체를 묻은 장소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였다.
게이시에 따르면 그는 길가에서 십대 소년이나 남창을 차에 태운뒤 성관계를 댓가로 돈을 주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거나 혹은 강제로 끌고갔다고 하였다. 버스 정거장에서 희생자를 데려온 사례도 있었다. 일단 집에 오면 희생자의 손에 수갑을 채우거나 밧줄로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리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게이시는 무력화된 희생자를 밧줄이나 널빤지 등으로 구타하여 성적 욕구를 해소하였으며 사체가 부패되기 전까지 자신의 집안에 방치해두기도 하였다.
경찰은 게이시의 집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고, 기자와 카메라맨, 경악한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후 4개월간 수많은 사체들을 발굴하였다. 1978년 12월에서 1979년 3월 사이에 게이시의 집 마루밑에서 29 구의 사체가 수습되었는데, 이중 신원이 파악된 가장 어린 희생자는 당시 14세였던 사뮤엘 스태플리턴(Samuel Stapleton)과 마이클 마리노(Michael Marino)였으며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21세였던 러셀 넬슨(Russell Nelson)과 제임스 마자라(James Mazzara)였다. 8구의 사체는 훼손 상태가 극심하여 신원이 파악되지 못하였다. 로버트 피스트의 사체는 1979년 4월 9일 데스 플레인즈 강에서 발견되었다.
1980년 2월 6일 시카고에서 재판이 열렸다. 게이시는 정신이상에 의한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이시의 변호를 맡은 샘 어미런트(Sam Amirante)는 게이시가 정신착란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범행 전후로 제정신을 찾았다고 하였다. 게이시는 자신의 죄는 묘지에서 뛰어다는 것 밖에 없다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희생자 모두 성관계 중에 질식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체포당시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법원은 3월 13일 게이시에게 유죄를 선언하며 사형을 선고하였다.
1994년 5월 10일 일리노이 주 크레스트 힐(Crest Hill)에 있는 스테이트빌 교화소(Stateville Correctional Center)에서 집행이 이루어졌다. 게이시의 몸에는 독극물이 주입되었다. 그의 마지막 식사는 새우튀김과 KFC 오리지널 한통, 그리고 감자튀김과 신선한 딸기였다. 집행은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으며 집행장소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게이시와 관련된 티셔츠를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이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군중들은 환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게이시는 자신의 범행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감옥에서 자신의 변호사에게 한 마지막 말은 자신이 죽는다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고, 죽기전 사형집행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엿먹어라(kiss my ass)’ 였다고 한다.
집행 당시 게이시에게 주입되던 화학물질이 비정상적으로 응고되어 게이시의 팔에 연결된 IV 튜브를 막아버렸다고 한다. 참관자들은 창문의 블라인드가 젖혀지면서 이 사실을 알게되었고, 집행자들은 튜브를 다른것으로 교체하였다. 10분 경과후 집행은 재개되었고 블라인드가 다시 젖혀진 후 18분 동안 집행이 이루어졌다. 마취과 전문의들은 집행인들의 미숙함을 비난하며 IV 101 튜브를 사용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리노이 주의 독극물 주사 방식은 교정되었다. 게이시 사건 부장검사 윌리엄 컨클(William Kunkle)은 그래봤자 그의 죽음은 피해자들의 죽음에 비하면 한참 편한 것이었다고 언급하였다.
게이시의 뇌는 사체에서 제거되어 그를 인터뷰했던 연쇄살인범 연구자 헬렌 모리슨(Helen Morrison) 박사에게 전달되어 연구되었지만 그의 뇌가 딱히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알려진 희생자와 실종일, 그리고 실종 당시 나이이다.
* 티모시 맥코이(Timothy McCoy) – 18세, 1972.01.03
* 존 버코비치(John Butkovitch) – 17세, 1975.07.21
* 대렐 샘슨(Darrell Sampson) – 18세, 1976.04.06
* 랜달 레펫(Randall Reffett) – 15세, 1976.05.14
* 샘 스테이플턴(Sam Stapleton) – 14세, 1976.05.14
* 마이클 보닌(Michael Bonnin) – 17세, 1976.06.03
* 윌리엄 캐롤(William Carroll) – 16세, 1976.06.13
* 릭 존스턴(Rick Johnston) – 17세, 1976.08.06
* 케네스 파커(Kenneth Parker) – 16세, 1976.10.25
* 마이클 마리노(Michael Marino) – 14세, 1976.10.25
* 그레고리 가직(Gregory Godzik) – 17세, 1976.12.12
* 존 스직(John Szyc) – 19세, 1977.01.20
* 존 프레스티지(Jon Prestidge) – 20세, 1977.03.15
* 매튜 보우먼(Matthew Bowman) – 19세, 1977.07.05
* 로버트 길로이(Robert Gilroy) – 18세, 1977.09.15
* 존 모워리(John Mowery) – 19세, 1977.09.25
* 러셀 넬슨(Russell Nelson) – 21세, 1977.10.17
* 로버트 윈치(Robert Winch) – 16세, 1977.11.10
* 토미 보링(Tommy Boling) – 20세, 1977.11.18
* 데이빗 탤스마(David Talsma) – 19세, 1977.12.09
* 윌리엄 킨드레드(William Kindred) – 19세, 1978.02.16
* 티모시 오로크(Timothy O’Rourke) – 20세, 1978.06
* 프랭크 랜딩인(Frank Landingin) – 19세, 1978.11.04
* 제임스 마자라(James Mazzara) – 21세, 1978.11.24
* 로버트 피스트(Robert Piest) – 15세, 1978.12.11
다음은 발견되었으나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희생자들의 7개 사건파일 번호이다. 사건 당시 신원이 파악되지 않았던 8구의 시신중 959UMIL 번은 2007년 6월 네브라스카(Nebraska) 주의 티모시 맥코이로 밝혀졌다.
7. Victor Feguer
8. Timothy Mcveigh
95년 4월19일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의 주범.
티모시 맥베이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소년 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고등학교때까지 A와 B학점을 유지했던 내성적인 성격의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펜들튼에서 2년제 대학을 다니며 컴퓨터를 전공했다.
무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졌던 맥베이는 군입대를 했으며 이때 미사일을 다루는 솜씨나 폭발물 제조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군복무 중 훗날 오클라호마 사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군동료 마이클 포티어, 테리 니콜스 등을 만나게 된다.
걸프전에 참가 무공훈자까지 받고 91년 12월 군에서 제대한 맥베이는 뉴욕 버팔로에서 경비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반정부 민병대에 가담하기 위해 캔저스, 애리조나등을 전전했다.
맥베이가 본격적으로 정부에 적대감정을 갖게 된 것은 지난 92년 불법 무기소지 혐의를 받던 민간인 랜디 위버가 연방수사관 들에게 반항하다 사살된 사건이 발생한데 이어 93년 텍사스 웨이코에서 사교집단 다윗파 교도 80명이 연방수사관들과 무장대치 끝에 의문의 화재로 몰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로 알려졌다.
이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맥베이는 1년전까지 애리조나에서 20대 초반의 여자친구와 갓난 딸을 데리고 트레일러에서 생활을 해왔다.
그리고 지난 95년 4월 19일 오클라호마 시티 연방건물 폭발물 테러사건 현장 부근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체포후에도 `연방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1997년 연방 배심원들로부터 1급살인 및 음모에 관한 11개 항목 전체에 걸쳐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2001년 6월 인디애나주 테러호트 연방교도소 사형집행실에서 독극물 주사에 의해 사형되었다. 멕베이는 죽기직전 최후진술을 하지 않고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하고 내 스스로 내 영혼을 지배한다'는 내용의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19세기 시 '인빅터스'(정복되지 않은 자)를 손으로 써서 제출했다.
맥베이의 사형은 유가족 대표 등 증인 10명과 기자 10명 등 20명 뿐아니라 교도소 밖에서도 수백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폐쇄회로TV를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는 1936년 켄터키주 오웬스보로에서 흑인 성폭행범 레이니 베시아(22)에 대한 교수형이 공개된 이래 65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 집행된 것이고, 1963년 유괴살인범 퓨거 이래 38년 만에 연방 정부 차원에서 집행한 사형이어서 미국내에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논란을 일으켰다.
9. Ronnie Lee Gardner
결론: 죄짓고 살지 맙시다.
*사진만 올리면 재미없을 것 같아, 원본글에 범인의 범죄사실을 추가했습니다.
http://eyewear.티스토리.com/666
다행히 그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식사를 한다면 맛을 느낄 수 있을까요??
사진작가 Henry Hargreaves의 컬렉션 "NO Second" 는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한
사형수의 최후의 만찬을 찍은 작품입니다.
1. Ted Bundy
테드번디 (Ted Bundy, 1946.11.24 ~ 1989.1.24)
출생: 1946년 11월 24일 일요일
출생지: 버몬트 주의 버링톤
출생명: 디오도어 로버트 코웰 (Theodore Robert Cowell)
1970년대 미국을 경악시킨 열쇄살인사건의 주인공 <테드번디>.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범죄를 저지른 약 5년간 30 ~ 100여명의 여성으로 추측된다.
미국인들에게 '연쇄살인범'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테드 번디이며 이로써 그는 많은 헐리운 공포/스릴러 영화계에 모티브/영감을 주기도 했다.
예를들어 연쇄살인 영화하면 딱 떠오르는 "양들의 침묵" 중에서 한밤 중 차를 몰고 가던 여성에게 팔에 기브스를 하고 다가가 도움을 요청했던 살인마 '버팔로 빌'이 바로 테드번디에게서 따온 것이다.
아동기
미혼모로서 당시 22세의 나이로 엘레아노 루이즈 코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미혼모라는 인식과 아들을 키울 능력이 부족해서였는지 그녀의 친부모에게 아들을 맡기고 떠난다.
조부모 역시 이를 걱정하여 테드번디를 자기 아들처럼 키웠는데 번디가 워낙 영리하고 착하게 자라 그의 조부모는 테드번디를 유난히 귀여워하며 사랑했다.
그러다 1950년 그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워싱턴주 타코마시로 옮겨 함께 살게되었는데 그 당시 그의 어머니 루이즈 코웰은 조니컬 페퍼 번디라는 이름의 군대 요리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테드번디는 조니와의 결혼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그 결혼으로인해 그는 테드 코웰에서 테드번디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 루이즈 코웰은 재혼 후 네 명의 다른 아이들을 낳았고, 테드는 그 아이들을 돌보느라 별로 남는 시간이 없었다.
당시 테드와 계부 사이엔 어떤 끈끈한 유대 관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목격자>라는 책에는 테드의 유소년기는 불행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부끄러움을 잘 탔고, 종종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청소년.청년기
어린시절 시애틀에서 자란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소심한 학생이었으나 이미 그의 한쪽에선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체인 톰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 청소년들이 그렇듯 다양한 성경험(성관계)을 했다.
ㅍㄹㄴ 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이에 끝나지 않고 잡지 속의 모델들을 ㅁㅁ하고 살해하는 망상을 꿈꾸었다.
크게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자기쪽에서 먼저 친구를 찾아다니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이성(여성)을 만나는것에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을 만나고 성관계를 가졌으나 적극적인 관계를 맺진 못했다.
또한 그는 ㅅㅅ보다 폭력적인 일에 더 관심이 많았고 쾌락을 느꼈던것 같다.
1965년 테드는 우드로우 윌슨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학위를 따기위해 퓌젯 사운드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심리학과 아시아학을 수강하다가, 겨우 두 학기를 채운 후에 시애틀에 있는 와싱턴 대학으로 전학했다.
1967년에 테드는 스테파니 브룩스라는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 만났다.
스테파니 브룩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 사귀며 친밀감을 느꼈고 이내 뜻이 통했다.
테드가 어떤 여성에게 친밀감을 느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 <내 옆의 낯선 사람>이란 책에 의하면 이때가 테드가 성적 행위에 연관된 최초의 시기라고 한다.
1968년 가을에 테드는 다시 캘리포니아 주의 팔로 알토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으로 이적했다.
그 직후 스테파니 브룩스는 와싱턴 대학을 졸업했고, 갑작스럽게 둘의 관계도 끝이 났다.
부유하게 자란 그녀이기에 목표의식 뚜렷한 성공 가능성이 있는 남성을 원했고 그에비해 테드번디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테드는 첫사랑을 잃어 상심했고, 다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성적도 떨어져서 그는 할 수 없이 학교를 자퇴하기로 결심한다.
테드는 다시 자신의 인생을 정상궤도로 올려 놓으려고 애쓰면서 지방을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1969년 테드번디는 버몬트에 위치한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 이르렀고 거기서 테드는 자신의 출생기록을 살펴보다가 또 한 번 더 가슴 쓰린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누이가 진짜 엄마였고, 현재의 엄마가 실제로는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자신의 누나가 사실은 어머니이고 부모라고 믿었던 사람이 조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심리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첫사랑-어머니-할머니, 테드에게서 이들 세 여자는 자신의 심리적 고통의 원인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에게 느끼는 자신의 성적 욕망과 여자에 대한 증오심 사이에서 테드는 인격의 균열이 이른 것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는 특히 어머니를 유달리 증오했고 여성에 대한 존재가 부정적이고 증오의 대상으로 인식되었을것으로 판단되며 그 안에서 존재한 검은 그림자가 깨어나게 된것이다.
1969년 가을 테드는 와싱턴 대학에 재입학하여 모든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테드는 첫사랑을 되찾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청년이 되었다.
그렇지만 스테파니는 그에대한 어떤 흥미도 없었다.
여기에 기죽지 않고 테드는 열심히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선거 운동을 뛰어다니며 지방 정치에 점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남는 시간도 아까왔던지 테드는 시애틀 클라이시스 병원에서 전화 봉사 활동을 했으며,
거기에서 테드는 얼마 안 있어 앤 룰이란 여자와 친해졌는데, 그녀는 수년 후에 <내 옆의 낯선 사람>이란 제목의 베스트셀러를 쓴 장본인이다.
또한 그곳에서 비서로 일하던 멕 앤더스라는 이혼녀도 만났다.
둘은 이내 데이트를 시작했고 앤더스는 얼마 후에 깊은 사랑에 빠졌다. 테드는 그녀에게 깍듯하게 대해 주었고 그녀의 어린 딸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무관심하게도 테드는 앤더스와 결합해 정착할 의사가 없었고,
앤더스 모르게 편지와 전화로 첫사랑 스테파니와 계속적인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후 2년간 테드는 정치 운동을 했으며 여러 법률 학교 수업을 들었다.
테드가 익사 직전의 세 살난 꼬마애를 구해줘 시애틀 경찰서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은 것도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 전도양양한 미래를 꿈꾸며 테드는 1973년 여름 와싱턴 대학을 졸업했고 이내 유타 대학 법률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앤더스와 지속되는 관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와싱턴 주 공화당 정치 운동 때문이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 다음해까지 테드는 유타 대학에 출석하지는 않았다.
공화당 업무차 여행을 하는 중에 테드는 옛날의 로맨스를 기억하며 스테파니와 다시 만날 결심을 했다.
새로워진 테드는 스테파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다시 한 번 사랑의 불길이 불붙었다.
두 사람은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함께 하는 많은 시간을 보냈고, 결혼 얘기도 심심치 않게 나누었다.
반면에 이혼녀 앤더스는 테드가 비밀스럽게 스테파니를 만나고 다닌다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는데, 테드는 스테파니와 뜨거운 재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 이혼녀를 향한 사랑을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스테파니는 테드가 이제는 자신이 꿈에 그리던 남자로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열어가는 미래를 희망하게 되었다.
이 두 여자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동안 불행히도 테드가 마음에서 겪고 있는 '변형' 또한 알지 못했다.
테드는 조용히 각각의 희생자들은 치밀하게 선택되었고 스테파니의 호리호리한 몸매와 헤어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을 목표로 삼았다.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지만 보통은 자제심을 발휘하게된다.
하지만 테드번디는 그런 자제심이 부족했고 언제부턴가 이로인해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시작했을것이다.
그가 다 성장하여 법률공부를 선택하고 이를위해 솔크레이크 시로 이주,
테드 번디는 잘 생긴 청년으로 사건이 발생할 무렵 미국 솔크레이크 시(市)에서 법률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그가 이러한 살인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촉망받는 변호사나 검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테드 번디는 엘리트 청년으로 주위에 평판이 좋았고 머리도 수재였다.
번디는 매력적인 법대생이었다. 그는 옆집 이웃이었고 이웃의 소년이었다.
범죄자의 시기
테드번디는 관음증을 즐겼다.
여자들의 집앞을 서성거리며 여자들이 옷을 벗는 것을 훔쳐보며 ㅁㅁ하는 망상을 즐겼고 결국 범죄자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훔쳐보는걸로 시작하여 여자들의 자동차에 다가가 타이어에 바람을 빼거나 간단한 부품을 조작한 다음 몰래 숨어서 여자의 반응을 살피는 비교적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커다란 쾌감을 주지 못했고 결국, 번디는 여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동전을 줍던 여자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비명을 질러댔고 테드번디는 당황하여 그 자리를 서둘러 도망쳤다.
경험부족에서 일어난 실패...이런 시행착오 끝에 그는 점차 대담하고 과격해진다.
1974년 1월 4일 18살의 소녀 조니 렌츠의 방으로 그는 들어간다.
조니는 시애틀에서 여러 명의 룸메이트와 커다란 집을 함께 쓰고 있었는데 그들 중 아무도 조니가 아침 식사 때 내려 오지 않는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의심조차하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낮에 가까워지자 친구들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그녀의 방으로 갔다.
조니는 자고 있는 듯이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조니가 흥건한 핏물 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고 그들은 경악했다.
이불보를 끌어내렸을 때 그 상황은 침대 옆 난간에서 부러진 막대기가 조니의 음부 깊숙이에 쑤셔 박혀 있는 것으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니는 아직까지도 숨이 붙어 있는듯 보였고 친구들은 재빨리 응급실과 경찰에 연락했다.
구급 의료 요원이 도착했을 때 조니는 뇌사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폭행 후에도 살아 남았다.
그로부터 4주후, 테드의 다음 피해자는 린다 앤 힐리였다.
그녀는 21살로 와싱턴 대학 법률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자 일기예보 아나운서였다.
린다 할리는 현관문을 열어 놓은채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그 집을 우연히 지나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목을 졸랐다.
린다 할리는 맹렬하게 저항하면서 발버둥을 쳤으나 이내 혀를 길게 빼어 물고 축 늘어졌다.
곧장 그는 그녀를 자신의 폭스바겐에 태우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옷을 벗기고 성폭행했다. 이어서 그는 린다 할리를 살해하고 시체를 버렸다.
린다 할리를 성폭행하고 살해하면서 테드번디는 그 여자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린다 할리를 다만 여자, 자신의 망상을 실행하는 도구로만 생각한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고귀한 생명체나 인격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성욕을 해소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잔인한 짐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74년 1월 31일, 린다의 룸메이트 한 명이 린다가 아직 직장에 출근하지 않았다는 직장 상사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룸메이트는 린다의 지하실 침실로 갔다. 침대는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고 그녀의 자전거는 구석에 놓여 있었다.
밤이 되어도 아무도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걱정하던 부모는 경찰에게 딸의 실종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사의 한 순서상 경찰은 형식적으로 린다의 방을 조사했다.
경찰관 한 명이 마침내 침대보를 벗겼을 때 베갯잇과 시트가 피에 흠뻑 젖어 있는 광경을 보고 기겁했다.
경찰관들은 이내 린다의 잠옷을 찾아냈고 그 옷의 네트라인에는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 경찰관들은 이 핏빛 현장의 주인공의 사체와 그 내막을 암시할 만한 단서조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로인해, 그 지방 경찰관들이 부지런히 린다와 그 범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가운데서도
테드는 자신이 잡힐 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일상 생활에 눈코뜰새없이 바빴다.
테드 번디는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며 여자들을 유혹했다.
그가 유혹한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나이 어린 소녀들이라는 것은 그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 폭력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사건을 저지르고 얼마지나지 않아, 1974년 2월 테드번디는 특별한 이유없이 결혼이야기까지 오고가던 스테파니와 이별을 한다.
수년전 첫사랑 스테파니가 자신을 걷어찼던 것처럼.. 그리고 그이후 스테파니는 테드를 만나기는커녕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내 생각이지만 테드번디는스테파니를 굉장히 사랑하고 증오했을것이라 생각된다.
증오했기에 어쩌면 스테파니를 자신을 버린 어머니 루이즈 코웰과 동일시! 그리하여 그녀와 닮은 젊고 여린 여성을 타겟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그녀를 사랑했기에 스테파니를 죽이지 않고 그녀와 헤어진것 같다. 아마 이때가 인간적이고 신사적인 테드번디의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 때를 기점으로 그의 ㅁㅁ과 살인은 계속된다.
하루에 두 여자를 폭스바겐으로 유혹하여 납치한 적도 있었다.
1974년 8월 삼마미쉬 호수로부터 대략 6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와싱턴에서 싸늘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는데 두 피해자는 꼭지 돌아간 광란의 ㅅㅅ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살해당한 듯이 보였다.
이때 테드는 한 여자를 납치한 뒤에 다른 여자를 납치하여 첫 번째 여자 앞에서 능욕한 뒤에 살해했다.
이 실종 사건을 통해 사건의 의미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장에는 증거가 없었지만,
와싱턴과 오레곤 주 살인 사건 사이에 보이는 유사점들이 곧 유타 주 수사관들의 관심을 끌었다.
세 개 주 수사관들은 합동으로 조사를 벌여 나가게 되었고 이윽고 이 모든 살인은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라는 데 결론을 맞췄다.
테드 번디는 여러 가지 방법(특히, 깁스를 하여 여성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여자들을 납치했지만 결말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종자들은 모두 호리호리한 백인 여자에 머리 중간쯤에 가름마를 탄 머리를 하고 있었고 모두 저녁 시간에 실종되었다.
실종 사건 수사가 강화되자 사건이 일어나던 시간에 폭스바겐을 운전하며 팔이나 다리에 깁스를 한 잘 생긴 남자가 목격되었다는 정보가 차례차례 입수되었다.
그 의문의 사나이가 접급했던 여자들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테드라고 밝혔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정도로 테드가 매혹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74년에서 1975년 8월까지 미국의 유타주에서는 약 8건의 ㅁㅁ살인사건이 발행했다. 경찰은 바짝 긴장했고 미국은 공포에 떨었다.
유타주에 이어 워싱턴주에서도 ㅅㅅ와 관련된 연쇄살인사건이 잇달아 발생했고 몇 번인가는 여자를 유혹하려는 순간에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다.
1974년 11월 8일, '캐롤 다론치'는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하다가 잘 생긴 청년의 유혹을 받았다.
그녀는 그의 폭스바겐까지 동행했다. 그러자 테드 번디가 수갑을 채우고 연장으로 머리를 때리려고 했다.
캐롤 다론치는 비명을 지른 뒤에 수갑 찬 손으로 차문을 열고 달아났다.
경찰은 폭스바겐을 운전하는 남자가 솔트레이크시의 어느 쇼핑몰에서 18살의 캐론 다론치라는 소녀를 납치하려고 했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어렵사리 그를 잡을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잡았다.
그 젊은 여자는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고 형사들에게 납치범의 인상착의와 차에 대해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솔트레이크시의 수사관들이 그 용의자를 찾는 동안에 유타 주 바운티 당국은 17살의 데비 켄트가 고등학교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한 목격자가 그 학교 주차장에서 황갈색 폭스바겐 차가 재빨리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살인은 넉 달 동안 주춤하다가 콜도라도 주에서 적어도 네 명의 여자가 실종되면서부터 다시 재개되었다.
약 한달 후, 실종된 여자들 중의 하나가 실종 장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피해자는 성폭행을 당했고 뭉툭한 둔기에 의해 살해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어 와싱턴에 있는 테일러 산맥은 그 살인자가 애용하는 매장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하나하나씩 여러 명의 여자들 유해가 발견되었으며 그들 중 하나는 나중에 21살의 린다 앤 힐리로 신원이 밝혀졌다.
1975년 8월 16일, 경찰은 유타주의 고속도로 순찰원이 폭스바겐을 몰고 있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여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순찰원이 번호판을 보려고 불을 비출때쯤 그 운전자는 도망치고 있었다.
추적 끝에 몇 블록을 가지 못하여 폭스바겐은 도로 옆에서 정차당했고
운전자에게 신분증을 요청하자 그는 디어도어 로버트 번디라는 이름이 적힌 운전면허증을 꺼내 주었다.
운전자가 수상쩍다고 생각한 경찰은 차를 조사하였고 그 안에서 한 쌍의 수갑, 기다란 끈, 쇠지레, 스키 마스크, 얼음 송곳과 나일론 스타킹을 찾아냈다.
희대의 살인마 테드 번디가 그 자리에서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
테드 번디는 기소되었다.
그는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고 해박한 법률 지식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미국인들, 특히 배심원들은 그의 뛰어난 말솜씨에 감탄했다.
체포된 테드번디와 납치 미수 캐롤 다론치 사건의 용의자 사이의 유사점을 알아채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캐롤 다론치가 그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관들은 혐의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더 필요했다.
테드는 납치 미수와 살인에 대해 모든 혐의 사실을 부인했지만,
경찰은 그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용의자의 배경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여러 주일에 걸쳐서 삼마미쉬 호수의 목격자들이 불려 와서 팔이나 다리에 깁스를 한 채 그 지역을 배회하며 테드라고 밝힌 남자가 용의자와 일치한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테드의 아파트를 수사하는 과정 중에 수사관들은 깁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인 석고반죽을 찾아냈다.
게다가 테드가 여러 피해자 시신이 발견된 테일러 산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피해자들 몇 명이 처음으로 실종된 마을들에서 가스를 구입하는 데 신용 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속속들이 밝혀졌다.
테드에게 불리한 증거들이 쌓여 갔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1976년 2월 23일 테드가 납치 미수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수사관들은 그를 살인사건과 연관지으려고 노력했다.
테드와 사귄 여성이자 그를 알고 있었던 베스트샐러 작가 앤 룰이 쓴 <내 옆의 낯선 사람>이란 책에 따르면 항상 공손한 자세와 잘 생긴 외모로 매력을 발산했던 29살의 테드는 유타 법정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동요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게 씌여진 혐의 때문에 심한 공격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일부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의 물결로 넘실거리게 만들었다.
테드는 납치에 실패한 다론치를 만났다는 사실조차 부인했지만
납치가 벌이진 시간의 행적에 대한 뚜력한 알리바이를 제시하진 못했다.
테드는 혐의 사실을 벗어 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지만 법정은 납치죄를 인정하여 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1976년 10월 22일,
콜로라도 경찰은 테드에게 23살의 카린 캠벨 살인 혐의를 추가 걸었다.
ㅁㅁ당하고 구타당한 시신이 1년 전 2월 17일에 발견되었고 경찰측은 테드가 그 범죄와 연관지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77년 4월, 테드는 콜로라도의 가필드 카운티 감옥으로 이송되어 그 해 11월 14일 캠펠의 살해 혐의로 예정된 공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다른 재판을 견뎌내고 싶지 않았고 탈옥을 계획한다.
1977년 6월 7일, 아스펜에 있는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던 테드는 감시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그는 훔친 차를 타고 마을을 벗어나려고 하다가 8일 만에 다시 붙잡혔다.
그후 거짓 7개월 후 무렵인 12월 30일 테드는 재탈출을 감행했다.
탈옥을 준비하는 동안 번디는 거의 먹지 않으며 자신의 체중을 14킬로그램 정도를 줄였다.
독방 천장에 전기비품 설치차 뚫어놓은 작은 구멍을 통해 빠져나갈 셈이었다.
천장 안으로 들어가 환기통을 통해 전진하여 간수가 사용하는 방의 벽장 속으로 숨어 들었다.
거기서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정문을 통해 빠져 나왔다.
탈옥 사실은 15시간 후에야 드러났고 테드는 그 시각 시카고로 가서 플로리다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미국은 경악했으나 희대의 살인마 테드 번디는 검거되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난처한 지경에 빠져 들었고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다음해인 1978년 1월 13일까지 테드는 따뜻한 남쪽 지방인 플로리다의 탤러해시 지역의 플로리다 주립 대학 근처에서 아파트를 얻어 살아가고 있었다.
생활은 좀도둑질로 때울 수밖에 없었고 그 지역에선 크리스 하겐이란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외모를 바꾸기위해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목격자>라는 책에 보면 이 기간 중에도 테드는 새로 얻은 자유가 그닥 못마땅한것 같고, 이제는 살인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978년 1월 14일 토요일 밤에 치 오메가 여대생 기숙사에 침입하였다.
피해자들의 방에 몰래 들어가 실신할 때까지 곤봉으로 때리는 방법으로 한 번에 4명의 여자들을 차례차례 폭행했다.
한 여생은 구타하다가 옷을 벗긴 뒤에 능욕을 하고 이빨로 온 몸을 물어뜯었다. 다른 여학생은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두 여학생은 숨졌으나 두 여학생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당시 해부를 담당한 검시의가 생생한 증언을 말해주었는데, 피살자 가운데 한 명은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ㅁㅁ당한 다음에 목졸렸으며 피살자의 엉덩이와 젖꼭지에서 이빨로 문 자국을 발견했다고 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한 여성은 헤어스프레이 금속깡통으로 성폭행당했음이 추가로 증명되었고 다른 이 역시 곤봉으로 구타당했고 목이 졸렸다 했다.
여학생 기숙사를 나온 테드 번디는 근방에 있는 다른 여학생의 집을 습격했다.
여학생이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곤봉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여학생은 두개골이 부서져 죽었고 그때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테드 번디는 현장에서 달아났다.
그리고 이제 테드는 재범하는 데까지 채 한 달도 기다릴 참을성이 없었다.
1978년 2월 9일, 12살의 킴벌리 리치 소녀 실종 사건이 부모에 의해 접수되었다.
민첩하게 경찰은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실종자의 위치를 파악해 내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다.
킴벌리의 실종 6일 후,
펜사콜라주의 한 경찰관은 주거지역을 순찰하다가 오렌지색 폭스바겐을 타고 주택지역을 살펴보는 한 사내를 보았다.
요식 절차상 경찰은 번호판을 확인하다가 그것이 도난 차량임을 알게 되었고 경찰관은 재빨리 라이트를 켜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용의자는 도망치다가 얼마 못가 길 한켠으로 정차당했다.
경찰관은 운전자를 차에서 나오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경찰관이 수갑을 채우려고 했을 때 용의자와 짧은 몸싸움이 이어졌고 용의자는 도망치려 했다.
경관은 총 한 방을 쏘았고 용의자는 땅에 쓰러졌다.
경관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용의자는 튀어올라 공격해 왔다. 또 짧은 몸싸움이 일어났지만,
이번엔 경관이 용의자를 제압 수갑을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테드 번디는 훔친 차를 가지고 다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매혹적인 말솜씨로 자신이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치과의사가 희생자의 둔부에 있는 이빨 자국과 번디의 이빨 자국이 동일하다는 감정을 하는 바람에 유죄가 인정되어 10년에 이르는 항소 소동도 소용 없이 1989년 1월 24일에 사형을 당할것을 선고 받았다.
테드 번디는 사형이 확정된 뒤에 '톰'이 범죄를 지시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을 주장하는 범죄자들은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인격체가 저지른 범행을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대부분의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 소유자들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인격체를 인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989년 1월 24일 테드 번디는 전기의자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테드 번디가 체포될 때 살인사건을 총지휘했던 로니 앤더슨 형사는 테드번디의 차를 사서 창고에 보관하다 1997년 테드번디의 폭스바겐을 경매에 붙이는 바람에 그 사건을 기억하는 온 미국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테드 번디 살인사건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살인광들의 상투적 특성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범인이 무지막지한 살인마가 아니라 법률에 해박한 수재이고 엘리트적인 청년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는 공화당에서 그를 고용한 적이 있을정도로 사회의 주류 문화에 속해 있었다.
공화당 안에서 테드는 눈부시게 활약했고 교활할 정도로 영리한 인간이었으며 붙잡혀 들어간 감옥을 2번씩이나 탈출하는 성공 기록도 있다.
법정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살인마 이전에 전형적인 미국의 인텔리였고
그의 사건보도는 버라이어티쇼가 되어 사형 당할 날을 기다리며 독수공방하는데도
수많은 여성들의 팬레터와 결혼신청이 쏟아졌으며 급기야 테드번디는 옥중에서 자신의 팬과 결혼한다.
이 사건에서 악마는 우락부락한 범죄형이 아니라 천재형의 부드럽고 미남형의 얼굴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교훈을 남겼다.
한가지 흥미로운것은 형사들은 테드 번디 사건에서 희생자의 둔부에 있는 치열을 채취하는데 성공하여 그를 기소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지금으로서는 간단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과학수사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살아생전에 있었던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 소름끼친 고백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2. Rickey ray rector
3. Allen Lee
4. Angel Nieves diaz
이 사람 식판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지막까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 했다는군요..
5. Stephen Anderson
6. John Wayne Gacy
존 웨인 게이시(John Wayne Gacy Jr., 1942.03.17~1994.05.10)는 미국의 연쇄살인자였다.
그는 1972년과 1978년 사이에 저지른 것으로 밝혀진 총 33건의 소년 ㅁㅁ 및 살인 사건에 대한 범행을 자백하였으며 그로인해 사형되었다. 피해자중 27인의 시신은 그의 집 마루 밑에서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시신들은 인근 지역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게이시는 ‘광대 살인마(Killer Clown)’ 라는 별명으로도 악명을 떨쳤는데, 이는 그가 ‘광대 포고(Pogo the Clown)’라는 이름으로 종종 아이들과 이웃들을 위한 공연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게이시는 미국 일리노이(Illinois) 주 시카고(Chicago)에서 기계 관련 일을 하는 아버지 존 웨인 게이시 시니어(John Wayne Gacy Sr., 1900.06.20~1965.12.25)와 어머니 마리온 일레인 로빈슨(Marion Elaine Robinson, 1908.05.04~1989.12.14)의 세 자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지역 결혼 기록에는 그의 어머니 이름을 ‘마리온 E 로빈슨’으로 기록하고 있다. 게이시는 폴란드 및 덴마크 계 혈통이었다.
게이시는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그를 학대하며 종종 ‘계집애같은 녀석’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신 누이들, 그리고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다. 이들은 그를 ‘조니(Johnny)’라고 불렀다.
게이시는 11세가 되던해 이마에 타박상을 입었다. 이때 가해진 충격으로 혈종이 생겼지만 16세가 되어서 일시적인 시각 상실이 잦아지면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증상 치료를 위하여 약물치료가 이루어졌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게이시는 고학년이 되기 전에 중퇴하고 가출하였다. 네바다(Nevada) 주 라스베가스(Las Vegas)에서 돈을 모두 소진한 그는 그곳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그는 고등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노스웨스턴 비즈니스 칼리지(Northwestern Business College)에 들어가 과정을 수료하였다. 눈-부시 제화(Nunn-Bush Shoe Company)에서 견습사원으로 일을 시작한 게이시는 1964년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Springfield)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동료직원 말린 메이어스(Marlynn Myers)를 만나 그해 9월 결혼하였다. 그는 스프링필드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청년상공회의소에 나가 1965년에는 부회장에까지 올랐다.
게이시의 처가는 여러개의 KFC(Kentucky Fried Chicken) 매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중 아이오와(Iowa) 주 워털루(Waterloo)의 매장 관리일을 맡겼다. 게이시는 이를 받아들이고 스프링필드에서 워털루로 이사를 갔다.
게이시는 워털루에서 지내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게이시는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도 다시금 이곳의 청년상공회의소에 나갔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점차 퍼져나갔지만 그는 열심히 활동하여 1967년 워털루 청년상공회의소 부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워털루의 청년상공회의소는 매춘과 ㅍㄹㄴ, ㅁㅇ 사업과 연계되어 있었고 게이시는 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게이시는 아내에게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었으며 지하실에 클럽을 열고 워털루의 소년들을 끌여들여 술을 마시게 하고 이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하였다.
게이시의 이러한 이중생활은 1968년 3월 16세와 15세 소년 두명이 그를 성추행 혐의로 기소하면서 흔들렸다. 게이시는 무죄를 주장하여 재판에서 승리하는듯 보였지만 같은해 8월 소년 하나를 매수해 기소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려던중 소년이 붙잡혀 모든 것을 자백하면서 체포되었다. 10년 형이 구형되었으며 게이시는 아이오와 주 교도소(Iowa State Penitentiary)에 수감되었다. 게이시가 수감되자 그의 아내는 여러차례 이혼을 요구하여 1969년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게 되었으며 게이시는 이후 자신의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같은해 크리스마스에는 그의 아버지가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게이시는 1970년 수감생활 18개월만에 가석방되었고, 일리노이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범행 사실을 철저히 감춘채 게이시가 새로 얻은 일은 시카고 식당의 주방장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도움을 얻어 1971년 시카고 북서쪽 8213 웨스트 서머데일(West Summerdale)에 자신의 집을 장만하였는데, 집 마루 밑에는 4 피트 깊이의 공간이 있었다.
1971년 2월 12일 게이시는 소년 ㅁㅁ 미수 혐의로 재판장에 섰지만 소년이 출석하지 않아 무효가 되었고, 1972년 6월 22일에는 다른 소년이 게이시가 가짜 보안관 뱃지로 유인해 차에서 ㅁㅁ하려 했다고 주장하였지만 마찬가지로 무효가 되었다.
1972년 6월 게이시는 십대 시절부터 알고지낸 캐롤 호프(Carole Hoff)와 결혼하였고, 호프는 두 딸을 데리고 게이시의 집에 들어갔다. 게이시는 1975년 PDM 토건(PDM Contractors)을 설립해 건설 일을 시작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부부관계가 악화되었다. 게이시의 부부 성생활은 중단되었고 그는 종종 늦게 나가 외박을 하였다. 아내는 젊은 남자 신분증이 든 지갑이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였으며 게이시는 게이 ㅍㄹㄴ를 집에 가지고 들어왔다. 게이시의 두번째 결혼은 1976년 결국 파경을 맞았다.
게이시는 지역 민주당(Democratic Party)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청소 자원봉사로 시작된 활동은 1975년과 1976년을 거쳐 구역장 자리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는 이 직위에 있는 동안 1978년 5월 6일 열린 폴란드 제헌절 퍼레이드(Polish Constitution Day Parade)에 참석한 영부인 로잘린 카터(First Lady Rosalynn Carter)와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당시 영부인은 사진에 ‘To John Gacy. Best Wishes. Rosalynn Carter’ 라고 썼다. 게이시는 그해 퍼레이드를 감독하였고, 사진상에서 미국 정보부에서 검증한 안전한 인사라는 표식을 달고 있었다. 훗날 가택수사가 이루어졌을때 발견된 이 사진은 미국 정보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75년 7월 게이시의 직원중 한명이었던 존 버코비치(John Butkovich)가 실종되었다. 버코비치는 급료 문제로 게이시와 다툰 후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버코비치의 부모는 경찰에게 게이시를 수사해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1976년 게이시의 다른 직원 그레고리 가직(Gregory Godzik)이 실종되었고 그의 부모 역시 아들이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게이시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였지만 버코비치 때와 마찬가지로 단서를 찾지 못하고 미결로 남았다. 경찰은 게이시를 추적하지도 그의 범죄기록을 조사하지도 않았다. 1977년 1월에는 버코비치, 가직, 그리고 게이시의 지인인 존 스직(John Szyc)이 실종되었다. 같은해 말 게이시의 직원 하나가 주유소에서 가솔린을 훔치다 체포되었는데, 그가 범행당시 몰고 있던 차가 스직의 것이었다. 게이시는 스직이 실종되기 전에 차를 그에게 팔았다고 하였으며 경찰은 더 이상의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게이시의 범행대상이 전부 살해된 것은 아니었다. 1978년 3월 게이시는 제프리 릭널(Jeffrey Rignall)을 자신의 차로 유인해 마취제로 의식을 잃게한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ㅁㅁ하고 학대한뒤 링컨 공원(Lincoln Park)에 버렸다. 그러나 릭널은 의식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검은색 올즈모빌(Oldsmobile) 자동차와 케네디 고속도로(Kennedy Expressway), 그리고 8213 웨스트 서머데일로 가는 경로의 몇 개의 도로들을 기억해냈다. 경찰은 현상수배를 통해 7월 15일 게이시를 체포하였다. 릭널 건으로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12월 한 19세 청년이 게이시가 자신을 권총으로 위협해 성추행하였다며 고발하였지만 시카고 경찰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1978년 12월 11일 15세 소년이었던 로버트 피스트(Robert Piest)가 방과후 일하던 데스 플레인즈(Des Plaines) 약국에 다녀오던중 실종되었다. 실종되기 전 피스트는 약국 동료에게 일자리를 찾기 위해 건설회사들을 좀 찾아볼 생각이라고 하였다. 게이시는 당시 약국에서 약국 주인과 건물 리모델링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데스 플레인즈 경찰이 게이시의 집에 찾아와 수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게이시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데스 플레인즈 경찰은 시카고 경찰과는 달랐다. 그들은 게이시의 범죄 기록들을 조회하였고 그가 이상성욕자로 기록된 내용을 찾아냈다. 12월 13일 게이시의 자택에 대한 수색이 실시되면서 경찰은 1975년도 고등학교 반지, 게이시의 것이 아닌 운전면허증, 수갑, 주사기, 게이시에게 맞지 않는 옷가지류, 그리고 피스트가 일했던 약국의 사진과 같은 의심스러운 것들을 발견했다. 또한 수색중 경찰은 집안 마루밑에서 악취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데스 플레인즈 경찰은 가직이 실종상태임을 알아냈다. 그의 집에서 나온 반지는 스직의 것이었다. 게이시의 이혼한 두번째 부인으로부터 버코비치에 대한 이야기도 알아냈다.
1978년 12월 21일 게이시의 직원중 하나가 그가 30 건 이상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했다며 제보해왔다. 경찰은 ㅁㅇ소지 혐의로 게이시를 체포해놓고 그의 가택을 다시 수색하였으며, 그의 집 마루 밑에서 인골을 찾아냈다. 추궁을 받은 게이시는 자신이 25~30 건의 살인을 저질렀으며, 사체 대부분을 자신의 집에 묻었다고 하였다. 또한 마루 밑에 더 이상 공간이 없어지면서 피스트를 비롯한 다섯 구의 사체를 데스 플레인즈 강 I-55 교량 밑에 유기하였다고 자백했다. 이 과정에서 게이시는 경찰에게 집안에 사체를 묻은 장소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였다.
게이시에 따르면 그는 길가에서 십대 소년이나 남창을 차에 태운뒤 성관계를 댓가로 돈을 주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거나 혹은 강제로 끌고갔다고 하였다. 버스 정거장에서 희생자를 데려온 사례도 있었다. 일단 집에 오면 희생자의 손에 수갑을 채우거나 밧줄로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리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게이시는 무력화된 희생자를 밧줄이나 널빤지 등으로 구타하여 성적 욕구를 해소하였으며 사체가 부패되기 전까지 자신의 집안에 방치해두기도 하였다.
경찰은 게이시의 집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고, 기자와 카메라맨, 경악한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후 4개월간 수많은 사체들을 발굴하였다. 1978년 12월에서 1979년 3월 사이에 게이시의 집 마루밑에서 29 구의 사체가 수습되었는데, 이중 신원이 파악된 가장 어린 희생자는 당시 14세였던 사뮤엘 스태플리턴(Samuel Stapleton)과 마이클 마리노(Michael Marino)였으며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21세였던 러셀 넬슨(Russell Nelson)과 제임스 마자라(James Mazzara)였다. 8구의 사체는 훼손 상태가 극심하여 신원이 파악되지 못하였다. 로버트 피스트의 사체는 1979년 4월 9일 데스 플레인즈 강에서 발견되었다.
1980년 2월 6일 시카고에서 재판이 열렸다. 게이시는 정신이상에 의한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이시의 변호를 맡은 샘 어미런트(Sam Amirante)는 게이시가 정신착란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범행 전후로 제정신을 찾았다고 하였다. 게이시는 자신의 죄는 묘지에서 뛰어다는 것 밖에 없다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희생자 모두 성관계 중에 질식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체포당시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법원은 3월 13일 게이시에게 유죄를 선언하며 사형을 선고하였다.
1994년 5월 10일 일리노이 주 크레스트 힐(Crest Hill)에 있는 스테이트빌 교화소(Stateville Correctional Center)에서 집행이 이루어졌다. 게이시의 몸에는 독극물이 주입되었다. 그의 마지막 식사는 새우튀김과 KFC 오리지널 한통, 그리고 감자튀김과 신선한 딸기였다. 집행은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으며 집행장소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게이시와 관련된 티셔츠를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이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군중들은 환호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게이시는 자신의 범행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감옥에서 자신의 변호사에게 한 마지막 말은 자신이 죽는다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고, 죽기전 사형집행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엿먹어라(kiss my ass)’ 였다고 한다.
집행 당시 게이시에게 주입되던 화학물질이 비정상적으로 응고되어 게이시의 팔에 연결된 IV 튜브를 막아버렸다고 한다. 참관자들은 창문의 블라인드가 젖혀지면서 이 사실을 알게되었고, 집행자들은 튜브를 다른것으로 교체하였다. 10분 경과후 집행은 재개되었고 블라인드가 다시 젖혀진 후 18분 동안 집행이 이루어졌다. 마취과 전문의들은 집행인들의 미숙함을 비난하며 IV 101 튜브를 사용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리노이 주의 독극물 주사 방식은 교정되었다. 게이시 사건 부장검사 윌리엄 컨클(William Kunkle)은 그래봤자 그의 죽음은 피해자들의 죽음에 비하면 한참 편한 것이었다고 언급하였다.
게이시의 뇌는 사체에서 제거되어 그를 인터뷰했던 연쇄살인범 연구자 헬렌 모리슨(Helen Morrison) 박사에게 전달되어 연구되었지만 그의 뇌가 딱히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알려진 희생자와 실종일, 그리고 실종 당시 나이이다.
* 티모시 맥코이(Timothy McCoy) – 18세, 1972.01.03
* 존 버코비치(John Butkovitch) – 17세, 1975.07.21
* 대렐 샘슨(Darrell Sampson) – 18세, 1976.04.06
* 랜달 레펫(Randall Reffett) – 15세, 1976.05.14
* 샘 스테이플턴(Sam Stapleton) – 14세, 1976.05.14
* 마이클 보닌(Michael Bonnin) – 17세, 1976.06.03
* 윌리엄 캐롤(William Carroll) – 16세, 1976.06.13
* 릭 존스턴(Rick Johnston) – 17세, 1976.08.06
* 케네스 파커(Kenneth Parker) – 16세, 1976.10.25
* 마이클 마리노(Michael Marino) – 14세, 1976.10.25
* 그레고리 가직(Gregory Godzik) – 17세, 1976.12.12
* 존 스직(John Szyc) – 19세, 1977.01.20
* 존 프레스티지(Jon Prestidge) – 20세, 1977.03.15
* 매튜 보우먼(Matthew Bowman) – 19세, 1977.07.05
* 로버트 길로이(Robert Gilroy) – 18세, 1977.09.15
* 존 모워리(John Mowery) – 19세, 1977.09.25
* 러셀 넬슨(Russell Nelson) – 21세, 1977.10.17
* 로버트 윈치(Robert Winch) – 16세, 1977.11.10
* 토미 보링(Tommy Boling) – 20세, 1977.11.18
* 데이빗 탤스마(David Talsma) – 19세, 1977.12.09
* 윌리엄 킨드레드(William Kindred) – 19세, 1978.02.16
* 티모시 오로크(Timothy O’Rourke) – 20세, 1978.06
* 프랭크 랜딩인(Frank Landingin) – 19세, 1978.11.04
* 제임스 마자라(James Mazzara) – 21세, 1978.11.24
* 로버트 피스트(Robert Piest) – 15세, 1978.12.11
다음은 발견되었으나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희생자들의 7개 사건파일 번호이다. 사건 당시 신원이 파악되지 않았던 8구의 시신중 959UMIL 번은 2007년 6월 네브라스카(Nebraska) 주의 티모시 맥코이로 밝혀졌다.
7. Victor Feguer
8. Timothy Mcveigh
95년 4월19일 168명의 목숨을 앗아간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의 주범.
티모시 맥베이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 출신으로 소년 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고등학교때까지 A와 B학점을 유지했던 내성적인 성격의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펜들튼에서 2년제 대학을 다니며 컴퓨터를 전공했다.
무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졌던 맥베이는 군입대를 했으며 이때 미사일을 다루는 솜씨나 폭발물 제조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군복무 중 훗날 오클라호마 사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군동료 마이클 포티어, 테리 니콜스 등을 만나게 된다.
걸프전에 참가 무공훈자까지 받고 91년 12월 군에서 제대한 맥베이는 뉴욕 버팔로에서 경비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반정부 민병대에 가담하기 위해 캔저스, 애리조나등을 전전했다.
맥베이가 본격적으로 정부에 적대감정을 갖게 된 것은 지난 92년 불법 무기소지 혐의를 받던 민간인 랜디 위버가 연방수사관 들에게 반항하다 사살된 사건이 발생한데 이어 93년 텍사스 웨이코에서 사교집단 다윗파 교도 80명이 연방수사관들과 무장대치 끝에 의문의 화재로 몰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로 알려졌다.
이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맥베이는 1년전까지 애리조나에서 20대 초반의 여자친구와 갓난 딸을 데리고 트레일러에서 생활을 해왔다.
그리고 지난 95년 4월 19일 오클라호마 시티 연방건물 폭발물 테러사건 현장 부근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체포후에도 `연방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1997년 연방 배심원들로부터 1급살인 및 음모에 관한 11개 항목 전체에 걸쳐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2001년 6월 인디애나주 테러호트 연방교도소 사형집행실에서 독극물 주사에 의해 사형되었다. 멕베이는 죽기직전 최후진술을 하지 않고 '내가 내 운명을 결정하고 내 스스로 내 영혼을 지배한다'는 내용의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19세기 시 '인빅터스'(정복되지 않은 자)를 손으로 써서 제출했다.
맥베이의 사형은 유가족 대표 등 증인 10명과 기자 10명 등 20명 뿐아니라 교도소 밖에서도 수백명의 희생자 가족들이 폐쇄회로TV를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는 1936년 켄터키주 오웬스보로에서 흑인 성폭행범 레이니 베시아(22)에 대한 교수형이 공개된 이래 65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 집행된 것이고, 1963년 유괴살인범 퓨거 이래 38년 만에 연방 정부 차원에서 집행한 사형이어서 미국내에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논란을 일으켰다.
9. Ronnie Lee Gardner
결론: 죄짓고 살지 맙시다.
*사진만 올리면 재미없을 것 같아, 원본글에 범인의 범죄사실을 추가했습니다.
http://eyewear.티스토리.com/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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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무리 만찬이라지만 죽기전에 저거 먹으면서 무슨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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