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5월 18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방한한 에티오피아 제국의 셀라시에 황제를 영접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1968년 5월 강원도 춘천시 공지천을 찾았다. 자신의 친위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기리는 '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 기념탑' 제막식 자리였다. 황제는 그 당시 기념탑 옆에 상록수 한 그루를 심었다.
[6.25전쟁의 역사를 간직해 둔 나라 - 호주]
8000여명 이상의 병력을 대한민국에 파병한 호주는 각 주마다 전쟁기념관이 있을 정도로 호주군의 파병을 후손들에게 알리는데 큰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캔버라의 전쟁기념관이 가장 잘 조성되어 있는데요, 이 전쟁기념관에는 호주가 지난 60년간 참여해 온 전쟁에 관한 모든 정보와 유물들이 정리되어 있고 특히 6.25와 관련된 자료들도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캔버라 전쟁기념관의 한국전쟁 참전기념조형물]
사진의 참전 기념 조형물은 경기도 가평에서 직접 공수해온 큰 바위들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왜 하고 많은 바위중 가평의 바위를 사용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가평은 1951년 4월23일 호주 군대가 한국군을 도와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곳 입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호주 군인들에게 가장 기억 나는 장소로 꼽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년 한국 재향군인회는 가평의 날을 기념하여 한국전에 참전했던 많은 호주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의 방문을 후원하고 있으며 이 특별한 기념식에는 많은 호주인들이 참석하고 있습니다.
캔버라 전쟁기념관의 한국관은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호주군인들의 사진과 유물들을 통해 6.25 전쟁의 진행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캔버라 전쟁기념관의 한국관 모습]
한국관에는 6.25 전쟁에 호주와 함께 전투지원국으로 참전한 16개국의 국기가 태극기와 함께 걸려 있습니다. 당시의 유물을 모아 놓은 사진에서 '안전보장 증명서'가 눈길을 끕니다.
호주의 참전군인들은 자신들의 6.25전쟁 참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소개해 드린 것처럼 호주의 현충일인 Aznac Day가 되면 이곳 캔버라의 전쟁기념관에서 잘 차려입은 군복에 빨간 양귀비꽃을 가슴에 꽃은 6.25 참전용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배스티언 박사와 참전기념동판]
6.25 참전국 호주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움직임은 호주 안에서 끝나지 않고 열정적인 한 분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고 있습니다. 바로 호주 멜버른의 치주전문 의사인 로스 배스티언 박사 노력 인데요. 배스티언 박사는 1990년부터 기부금을 모으고 자비를 들여 세계 20여 개국에 참전한 호주군을 기념하는 160여 개의 동판을 만들어 각국에 기증하고 있습니다. 배스티언 박사는 “기념 동판을 보내는 것이 세계 역사 속 호주의 역할을 알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며 제작의도를 밝혔습니다. 한국에도 배스티언 박사가 보낸 동판이 있습니다.
주한 호주대사관에서 마땅히 전시할 곳이 없어 2007년부터 보관하고 있던 이 동판은 한국 공군 60주년 기념식이 예정된 10월에 호주의 6.25 전쟁 참전용사들의 방한과 맞춰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 설치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형제의 나라, 투르크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 - 터키]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로 불리운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가면 ‘한국공원’이 있습니다. 1950년 일면식도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돕기 위해 터키에서는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자원하여 한반도를 찾았습니다.
특히 터키군을 한국에 파견한 스토리는 들을 때마다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초 터키는 한국전쟁에 5,000명 정도의 병력을 보낼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집결과 1만5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자원을 했다고 합니다. 동양의 자그마한 나라가 전쟁으로 공산화될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도 나도 `한국행`을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터키의 군인들은 다른나라와는 다르게 전원 자원병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평화와 인류애를 위한 마음 하나로 낯선 땅을 찾은 터키의 젊은이들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한국 땅에서 산화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싸우다 쓰러져간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터키정부에서는 수도 앙카라 한복판에 넓고 바른 땅을 골라‘한국공원’을 세웠습니다.
[한국공원 입구]
공원에 들어서면 우리나라에서 막 옮겨 온 듯한 석가탑모양의 충혼탑이 서 있습니다. ‘한국참전토이기기념탑’이라는 팻말이 아래 붙어 있는데 ‘토이기’는 ‘터키’를 우리식으로 써 놓은 것이라고 하네요. 기념탑 팻말 위로는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 대한민국에서 생명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한국공원의 한국참전토이기기념탑]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에 참전한 터키에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서울의 여의도에 터키수도의 이름을 딴‘앙카라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서울의 앙카라 공원]
생존해 있는 터키의 참전용사나 그들의 후손들은 이름 앞에 `코렐리(Koreli - 한국인)`라는 표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터키인들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형제의 나라 터키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것이 평생의 자랑입니다 - 에티오피아]
[한국에서 겨울을 나던 에티오피아 각뉴대대]
최빈국하면 떠오르는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에티오피아군은 화천, 금화, 양구, 철원 등 강원도의 최전방지역에서 공산군과의 치열한 전투는 물론이고 생전 처음 겪어보는 추위와 싸우며 희생했습니다. 다행히 에티오피아 군은 6.25 전쟁 참전 16개국 중 적군에 사로잡힌 포로가 유일하게 없을 정도로 용맹한 부대였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의 한국마을]
휴전 후 에티오피아로 귀국한 참전용사들은 셀라시에 황제로부터 아디스아바바의 북쪽 웨레다 지역에 정착할 땅을 하사받고 이곳에서 명예로운 참전용사로서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74년 멩기스투의 공산정권 들어 이들 참전용사들에 대한 시련이 시작됐는데요. 공산권 동맹국인 북한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얼마되지 않은 연금까지도 끊기게 되었습니다 . 심지어 공산정권의 횡포에 못견디고 하나둘 씩 참전용사에게 하사됐던 '한국마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6.25 전쟁 참전용사 중 생존자는 2000명 정도라고 하는데요 이들 참전용사들은 한 달에 나오는 연금 120비르(한화 약 1만3000원)로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렵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최빈국에서도 가장 힘겨운 생활을 하는 것을 부끄럽거나 슬퍼하지 않고 한국전쟁 참전경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노병 쉬퍼로우 게브레 볼드]
"내 비록 온 몸에 총탄이 박히고 팔, 다리를 잃었지만 자유를 위해 싸운 자부심으로 한 평생 살아왔습니다. 가난과 고통, 멸시가 대물림 되어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키고 있지만 한국이 발전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합니다."
이들은 아직도 참전 당시의 태극기를 곱게 보관해 6월25일이 되면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한다고 합니다.
[마을회관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러 가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에티오피아의 참전용사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지난해 춘천시는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아픈쵸베르 공원에 참전용사회관과 기념탑을 건립했습니다. 이 곳은 현재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부상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을 기리고 생존자에게는 보은의 쉼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회관 건립식]
에티오피아인들은 반세기가 넘게 지나서야 참전용사들에 대한 감사함을 전달한 대한민국을 원망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59년이 넘게 대한민국을 사랑해온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땅에는 한글로‘에티오피아 제국의 용사’적혀진 세겨진 참전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참전기념탑의 비문내용]
낯선 나라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참전용사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려면 꼭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부산에 건립된 UN기념공원에 대한민국을 위해 생명을 바쳤던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UN기념공원의 묘지]
부산 UN기념공원을 찾기 어렵다면 사이버 UN 기념공원에 방문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건 어떨까요? 지원 병력 대한민국 590, 911명
총 병력 : 933,845명 의료지원국 [출처] (한국전쟁 60년) 6.25 전쟁 참전국|작성자 L 레저드 라이즈 피해 상황
대한민국
미국
총계: 474,000명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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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적에 평소에 구걸하던 사람들한테 돈 한번 줘본적 없고,( 안좋은 소문도 많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어릴때 냉소적이였던것 같은데 하여간 지하철이나 기타 등지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라던지, 동냥하는 사람들은 평생 무시하면서 살아왔음.. 근데 2009년도에 내가 살던 시애틀에서 미국애들하고 같이 LA로 놀러간다고, 차를 타고 로드트립을 하던 중에 주유하러 캘리포니아 북쪽 어느 시골마을에 주유하러 주유소에 잠시 들려서 물좀 빼고 겸사겸사 음료수도 사고 나오는데 어떤 백인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서 가슴팍에 "KOREAN WAR VETERAN" 라고 쓰인 박스조각같은걸 걸치고 앉아있었는데, 내가 지나가는 순간 눈빛이 마주쳤는데 "Very hungry please son" 라고 말했는데 왠지 가슴이 뭉클해져서 평생 적선한번 해본적 없는 내가 20달러나 적선했지.. 미정부입장에서 당시의 파병이야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생판 남의 나라에서 목숨걸고 싸운, 어떻게 보면 참 고마운 내 할아버지 세대의 참전용사중 하나가 고국(미국)에서 저렇게 비루하게 연명한다는 생각에 한국인으로써는 눈물이 핑 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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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지키기위해 싸우다가 돌아가신분들과 남의나라에와서 목숨걸고 싸우다가 돌아가신분들을위해 묵념 진짜 저분들은 잊지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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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받던 나라가 다른나라에 오히려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나라가 우리나라가 처음임. 이런 기적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바로 우리할머니 할아버지 세대 분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기위해 목숨걸고 싸우신 un군과 우리나라 군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는겁니다.지금 이분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지도에 없었을테고, 또한 이런 기적적인 일(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 주는 나라가 된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주신 un군과 우리나라 군인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 잊지 않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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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대로 믿고 싶지만 진실은 좀 다릅니다. 위 나온 분들의 피와 땀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일인 건 사실이죠. 그러나 그 이면에 다른 부분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참고서적. 한국전쟁, 박태균, 책과함께, 2005. p.386 ※ 기네스 북에 오른 유엔군의 최대 참전, - 한국전쟁에 투입된 유엔군의 최다국 참전은, 그 명분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자유진형의 통합적 결단’이라 치장되지만, 실제로는 1950년 7월 30일 미국이 유엔군에 협조하지 않은 나라에 대해서는 ‘마셜 플랜 원조’를 중지할 것이라 결정 · 선언한 배경이 한몫했다. 이 책은 [책을 말하다, KBS]와 [한겨레] 선정 2005년 올해의 책으로 뽑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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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라박지호//국가적인 입장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동방의 작은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자원하신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압니다. 한겨레가 그렇게 싫어하는 미국에서도 부족할 것 없는 집안의 자제들이나 명문대학생들이 참전한 경우도 많습니다. 다른 나라 참전 용사들 중에서도 한국을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지시는 분들도 많고요. 지금의 우리 입장에서야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나라 하나 망하는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전쟁에 자원할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시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이고 냉전의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공산주의, 전쟁에 대한 공포가 극심하던 시대라 사람들에게는 동방의 작은 민주주의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역시 중요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전쟁 이후에 우리나라에 막대한 지원을 해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 한국의 교육,의료, 복지를 위해 평생을 바친 분들도 우리는 잊지 않고 감사해야합니다. 전략적 요충지라서 도운거니 고마워 할 필요 없다는 식의 댓글은 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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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받던 나라가 다른나라에 오히려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나라가 우리나라가 처음임. 이런 기적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바로 우리할머니 할아버지 세대 분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기위해 목숨걸고 싸우신 un군과 우리나라 군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는겁니다.지금 이분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지도에 없었을테고, 또한 이런 기적적인 일(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 주는 나라가 된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주신 un군과 우리나라 군인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 잊지 않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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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 | 12.04.09 02: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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