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반역 블루레이 발매를 기념하는 취지에서, 반역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호무라가 작품 내에서 취한 행동과 그로 인해 창조된 세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견을 취합하고 분석한 다음, 호무라의 세계에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제 나름의 견해를 개진해 보았습니다. 후속작에서 우로부치가 비틀어 버리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분석 자체로 재밌잖습니까.
취합 과정에서 참고한 사이트는 [한국어] 국내 애니메이션 커뮤니티, 리그베다위키, 마마마 관련 블로그, [영어] 마마마 영문위키, 영어권 커뮤니티의 애니메이션 관련 서브포럼, 각종 영문 블로그 정도가 있으며, 일본어 실력이 초급 수준에 불과한 관계로 일어 사이트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참고하였습니다. 주변 지인들과의 대화내용도 상당 부분 반영되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의견이 취합된 것은 아니며, 공신력 없는 기준에 따라 ‘분류’된 의견인 만큼 각 유형에 해당하는 개개인의 의견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논의는 우선 반역의 이야기에서 있었던 “객관적 사실을 확정”한 다음, 그 사실들의 배경에 있는 호무라의 의도가 어떠했는지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 분석들을 기초로 하여, 호무라의 세계를 평가하는 데 검토될 수 있는 다양한 쟁점을 검토합니다. 그리고 결론에서, 이 모든 정보들을 종합하여 호무라의 세계의 평가, 그리고 종합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합니다.
2. 호무라는 무슨 일을 하였는가? :: 객관적인 행위의 확정
호무라의 행동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호무라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확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반역의 이야기에서 호무라가 마도카를 죽였다’와 같은 사실무근의 명제를 전제로 하는 주장은 전혀 의미 없는 것이겠지요.
사실 1. 마도카를 둘로 나누었다.
근거 : ① 마도카가 둘로 쪼개지는 명백한 연출 ② 호무라의 발언 (“내가 빼앗은 것은 마도카의 극히 일부이다”)
사실 2. 원환의 섭리는 존속하고 있다.
근거 : ① 호무라의 발언인 “마수가 모두 멸망한 뒤~”는 현재 마수가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원환의 섭리 없이는 마수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는 현재 원환의 섭리가 존속하고 있음을 뜻한다. ② 호무라의 발언 “내가 빼앗은 것은 마도카의 극히 일부~” 역시 원환의 섭리 자체는 유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3. 호무라가 가진 힘의 근원은 사랑이다.
근거 : ① “사랑이야”
사실 4. 마도카, 사야카, 나기사는 어떤 이유에서든 부활했다.
근거 : ① 명백함.
위 사실들과 다른 사실을 전제로 한 주장은 취합되지 않거나, 가정적으로만 고려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만약 호무라의 행동으로 인해 원환의 섭리가 파괴되었다면 ~할 것이라 보는 주장이 있다’는 식입니다.
3. 호무라의 주된 의도는 무엇인가? :: 마도카와의 관계
이 대분류는, 어디까지나 “호무라가 마도카를 대하는 초심을 잃었는가?”는 주제에 한정된 것이고, “마도카 이외의 다른 것들을 대하는 태도가 비윤리적인가?”와 같은 관점이 배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장에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마도카와의 관계’에서만 호무라의 행위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세계와의 관계는 4장에서 별도로 논의합니다.
또한, ‘호무라가 마도카를 대하는 의도 자체’가 정상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일단 본장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는 4장과 5장에서 나누어 논의합니다.
3.1. 의견 1 : 호무라는 초심을 잃었다 (마도카에 대한 의도가 바뀌었다)
주장 : “호무라는 초심을 잃고, 이전까지 마도카에 대한 목적과는 정반대로,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위 주장에서 극도로 이기적이라 함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마도카에게 피해를 주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비합리적이라 함은 ‘원환의 이치에서 함께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마화하기 이전까지의 호무라는, 최소한 마도카에 대한 관계에서만큼은 극도로 자기희생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을 보여줬습니다. 허나 악마화를 기점으로 호무라는 마도카에 대한 관계에서까지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지요. 이처럼 행동양식이 한 순간에 바뀐 현상을 타당하게 설명하려면, 호무라가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휩쓸린 나머지 초심을 잃었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근거 : ① 악마화 전후 호무라의 발언, 행동 : 호무라가 악마가 된 이후에는 표정이 이전과 크게 달라짐은 물론,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호무라가 정상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② 소울 젬 오염의 일반적 효과 : 본편 사야카의 사례, 소울 젬=영혼이라는 설정 등에서 알 수 있듯, 소울 젬 오염은 일반적으로 합리적 사고능력의 저하를 수반합니다. 그런데, 반역의 이야기에서 호무라의 소울 젬은 큐베에 의해 한계치까지 오염된 상태였습니다. 이는 곧 호무라의 합리적 사고능력 역시 크게 떨어져 있었을 것임을 알려줍니다.
비판 : ① 근거 ②에 대한 비판 : 가장 먼저 소울 젬 오염으로 인해 호무라가 광기 또는 비합리적 판단에 휩쓸렸다는 근거에 대해 보겠습니다. 일단, 호무라의 소울 젬은 반역의 이야기 시작시점부터 이미 한계치까지 오염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 않은 소울 젬이 ‘마녀의 결계’를 생성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울 젬 오염의 일반적인 효과 때문에 호무라의 목적이 변질되었다고 보기 위해서는, 반역의 이야기 전반에 걸쳐 호무라의 판단능력이 저하되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적으로, 본편의 사야카는 한계치에 다다르기 전부터도 이상행동을 보였지요) 하지만 그럴 경우, 자신이 생성한 결계 내에서 호무라가 어떻게 ‘(쿄코에 따르면) 호무라다운’ 행동으로 진실에 접근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큐베의 음모를 파훼하기 위해 스스로 영원히 마녀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됩니다. 소울 젬이 한계치까지 오염된 상태에서도 제정신에서 행동을 했다는 말이 되어 버리니까요.
여기에 대해 ‘소울 젬 내부에 저주를 쌓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호무라의 의도가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재반박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하더라도 ‘소울 젬 오염의 일반적 효과’를 위 주장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위 재반박은 ‘스스로 저주를 받아들였기 때문에’라는 새로운 근거를 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스스로 저주를 받아들였다’는 근거에 대한 비판 : 이 재반론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는데, 바로 마도카의 손을 붙잡은 직후 ‘드디어 잡았어’, 그리고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라고 말한 이유를 설명하기 애매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호무라의 의도가 변질된 시점은 핏빛 저주를 스스로 쌓기 시작한 때입니다. 좀 더 방어적으로 본다면, 호무라 구출작전 진행 중, 마도카가 호무라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 시점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시점으로 잡든 간에, 호무라가 광기에 휩싸인 시점과 호무라가 반역을 개시한 시점 사이의 시간간격은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짧습니다.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드디어’, ‘오랫동안’의 의미를 ‘오래 전부터 바라 왔던 소원을,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떠올렸다’는 쪽으로 해석하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호무라가 ‘갑자기 변한 것이다’는 현재의 주장과 상충하게 됩니다. 결국, 스스로 저주를 받아들인 시점에서 호무라가 급격하게 제정신을 잃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③ 한편, ‘욕망에 눈이 멀었다’는 부분 자체도, 작품 내 명시적인 대사를 근거로 한, 가장 강력한 형태의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호무라의 악마화를 목격한 사야카가 “저게 뭐야? 욕망? 집념? 아니야, 그런 것과는 달라”고 말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야카가 말한 ‘욕망’은 ‘집념’과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가장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넓게 해석할 경우, ‘욕망’은 ‘사랑’과 상당 영역을 공유하기에, 사야카의 위 발언은 ‘사야카는 아직도 바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결론밖엔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예로, 사야카가 말한 욕망을 ‘인간의 욕구 전체’로 해석해 버리면, 사야카는 ‘호무라에게 감정이 없어!’라 말하고 있는 꼴이 되어 버리겠지요.
즉, 호무라의 행동변화는 어디까지나, 일관된 목표의 바탕에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양면성으로 인해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해야지, 호무라의 목표가 급작스럽게 바뀌어 나타난 것이라 해석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④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위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호무라가 이기적인 욕망에 매몰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호무라가 마지막에 마도카 앞에서 “(너와 적이 되어도) 상관없어, 나는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바라니까” 라고 말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묘연해지게 됩니다.
그 탈출구로 첫째, ‘마도카의 행복을 바라는 호무라 자체가 미쳐 있는 것이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는 이후 4장에서 논의할 문제이지, 현재의 맥락에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지금의 맥락은 어디까지나 ‘호무라와 마도카 사이의 관계’에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일단 호무라가 자신을 뒤로 미루고 마도카의 행복을 최우선시하는 이상, “호무라는 정신이 이상해져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취한 것이다.” 라는 주장의 설득력은 약해지게 됩니다.
두 번째 탈출구로는, ‘일시적으로 호무라의 목적이 되돌아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이 의견은 3.2.에서 소개할 ‘호무라의 내면이 분열되었다’는 주장으로 전환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지금의 주장만은 호무라의 마지막 대사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낼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⑤ 작품 외적인 비판 : 만약 호무라가 ‘변질되었다’고 파악해 버린다면, 본편에서 제시되었던 주제임과 동시에 신편 팜플렛에서 우로부치가 재차 강조했던 ‘성장’이라는 주제를 읽어낼 수가 없게 됩니다.
⑥ 지금까지와 다른 맥락에서, ‘합리성’ 부분을 검토해 봅시다. 이 논점과 관련해서 제시되는 설명은, 대체로 ‘호무라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선택은 원환의 섭리에 인도되어 마도카와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무라는 마도카를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이를 거부하고, 악마화라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였다.’는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하지만, 호무라가 마도카를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멀었다고 해석하면,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여러 군데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합니다. 악마화 이후 시점에만 한정하여 보더라도, 악마화 이후의 세계가 ‘호무라가 마도카를 독차지할 수 있는 세계’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 특히 마지막에 마도카를 적으로 돌리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대사가 ‘마도카의 독차지’로 해석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습니다.
⑦ 기타 ‘마도카에게 피해를 준 건 맞느냐?’같이, 가치평가가 개입될 여지가 큰 반론들은 5장을 참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3.2. 의견 2 : 호무라의 내면이 분열되었다.
주장 : 호무라의 내면에는 현재 마도카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와, 마도카는 어찌되었든 마도카와 함께하고자 하는 의도가 혼재되어 있다.
근거 : ① 호무라 구출시의 연출 : 호무라 구출 장면에서, 호무라가 이른바 ‘마녀무늬’를 하고 머리를 땋은 호무라와, 머리를 푼 호무라의 두 모습으로 분열된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호무라의 내면이 분열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② 악마화 전후 호무라의 발언, 행동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호무라의 악마화 직전 행동, 직후 행동, 그리고 마도카와 대면했을 때의 행동은 일관적이지 못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호무라의 내면이 조각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비판 : ① 근거 ①에 대한 비판 : 한 인물을 둘로 나누어 표현하는 연출은, 한 인물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는 방법으로도 자주 사용됩니다. 때문에, ‘한 인물을 둘로 나눈 연출이 있더라’는 사실에서 ‘그 인물이 분열되어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그 인물의 내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거 ①은 다른 더 명확한 근거 없이 독자적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 사용되기 어렵습니다.
위와 같은 반박을 논외로 하고, 그 연출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문제점은 남아 있습니다. 근거로 제시된 장면에서 호무라는 마도카의 ‘손길’ 덕에 소위 ‘마녀무늬’에서 벗어나 제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즉, 이 시점에서 호무라는 연출상 ‘분열 상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마화 이후의 호무라에까지 이 ‘분열 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 다음으로, 이와 같은 분석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살펴봅니다. 작중의 주연급 인물이 분열을 겪고 있다는 분석은, 그 스토리 자체가 그런 형태의 분열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지양되어야 할 해석방법입니다. 인물의 고뇌와 갈등이라는, 스토리의 중추가 되는 요소를 ‘그냥 그 사람이 분열되어서 그래’ 라는 ‘정신이상의 결과물’로 치부해 버릴 여지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마마가 이런 형태의 ‘분열’을 소재로 하고 있지 않음은 본편을 보나, 신편의 우로부치 인터뷰를 보나 명백합니다.
물론, 다른 타당한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까지 이 해석을 피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3.1. 및 3.3.과 같이 다른 타당한 해석이 존재하는 이상, 3.2.는 그 설득력을 상당 부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3.1.에 따를 경우 이르게 되는 최종적인 결론과 공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④ 근거 ②에 대한 비판 : 이 근거는 호무라가 미쳤다는 의견에 따르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호무라의 목적이 일관적이었다는 의견에 따르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데 맹점이 있습니다.
3.3. 의견 3 : 호무라의 의도는 일관적이다. (≒ 호무라는 원래부터 미쳐있었다)
호무라가 원래부터 미쳐있었다는 주장과 비슷하다고 적은 이유는, ‘일관적으로 마도카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미쳤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 중 어느 관점이 더 타당한가에 관하여는 4장에서 다룹니다.
주장 : 호무라는 일관적으로 마도카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다.
근거 : ① 호무라는 악마화 직전까지 지극히 일관적으로 ‘마도카를 지킨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뚜렷한 사건이 없었음에도 급작스럽게 그 신념이 깨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반증이 없는 한, 호무라의 신념은 악마화 이후에도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호무라가 악마화 이후 마도카와 대면했을 때 “그래도 나는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바라니까”라 말했던 것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② 꽃밭의 대화와, 구출작전에서 있었던 마도카와의 대화를 통해 미루어 본다면, 호무라의 변화는 ‘목적의 변화’가 아니라 ‘방법의 변화’에 불과합니다.
비판 : ① 이 의견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연출이 풍겨내는 ‘이미지’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마도카의 손을 붙잡으며 내뱉는 ‘드디어 잡았다’ 이하의 대사가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Fisrt-take에서의 연기 또는 코믹스판의 연출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② 비단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악마화 이후 호무라의 대사의 내용에 집중해 보더라도, 마도카에 대한 호무라의 의도가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구출작전에서 있었던 마도카와의 대화에서, 호무라가 ‘어떤 죄라도 짊어질 수 있어’와 같이 말한 것 역시 호무라의 의도가 변질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③ 여기에도 3.1.과 유사하게, ‘마도카에게 피해를 준 게 맞느냐?’는 논쟁이 벌어질 여지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5장을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④ 호무라가 마지막에 한 “마도카, 너는 욕망과 질서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라는 말은, 호무라가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지금과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자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의 전개 : 저는 개인적으로 마도카에 대한 호무라의 의도는 일관적이라고 보는 바, 위 비판들에 대한 재반론을 해 봅니다.
① 먼저 비판 ①을 살펴보면,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캐릭터의 행동동기를 단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합니다. 마마마라는 작품, 호무라라는 캐릭터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데, 본편에서 있었던 등장인물들의 외면과 내심의 괴리를 떠올려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인물이 주었던 이미지와, 본편 완결시점에서 알 수 있었던 인물들의 실제 내면을 보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특히 호무라에 있어서 그런 괴리는 매우 심한데, 호무라라는 캐릭터 자체가 항상 자기 본마음을 숨기고, 가면을 쓰고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마 호무라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호무라는 마도카에 대한 초심을 완전히 잃은 것 같은데?”라고 주장하는 것은, 본편에서 토모에 마미가 그랬던 것처럼, 오해의 발단이 될 여지가 충분합니다. 즉,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논거일 뿐, 주된 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② 그렇다면 악마 호무라의 대사와 행동을 살펴봅시다. 이들의 내용을 통해서 호무라가 자신의 제1목표였던 ‘마도카를 지키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 또는 그 목표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원환의 섭리를 존속시킨 것, 결국엔 마도카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 ‘마도카에 대한 사랑’이 힘의 근원이라는 것이 그러한데, 이러한 대사들은 ‘호무라의 목표가 일관되어 있다’고 해석할 때에만 설명 가능합니다.
‘드디어 잡았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라는 대사도, 호무라의 목표가 일관되어 있었다고 해석하는 경우에만, 다른 추가적인 전제나 가정을 도입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③ 따라서, 악마화 이후의 일련의 행동 및 거기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를 근거로 호무라의 의도가 변질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현재 논의의 범위를 오로지 마도카에 대한 마음에 한정하고 있음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④ 또한, 5장에서 살펴볼 내용과 같이, 호무라의 행동이 마도카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호무라의 행동의 극단성을 이유를 하더라도, 최소한 마도카에 대한 관계에서만큼은 호무라의 의도가 변질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⑤ “마도카, 너는 욕망과 질서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라는 대사는, 충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야카가 말했던 ‘욕망’은 ‘집념’과 상응하는 개념이었는데 반해, 호무라가 이때 말했던 ‘욕망’은 ‘질서’와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사야카의 대사에서와는 달리 ‘광의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때의 ‘욕망’에 ‘사랑’이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것에 무리가 없습니다.
한편, 위 대사가 (나의) 욕망과 (너의) 질서를 물어본 것이 아니라, (너의) 욕망과 (너의) 질서를 의미한 것이라 해석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즉, 호무라는 마도카에게 “너는 너의 행복과 질서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라 물어본 것이고, 마도카는 “내 행복 때문에 질서를 망가뜨리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닐까?” 라는 의미로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마도카의 대답을 받은 이후 호무라가 한 발언과 행동을 잘 설명할 수 있기도 합니다.
⑥ 종합적으로, ‘호무라의 의도는 일관적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설득력이 약한 반면, 앞서 살펴본 ‘호무라의 의도가 변질되었다’ 또는 ‘호무라의 의도가 분열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호무라의 의도가 일관적이었다’는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바입니다.
3.4. 호무라의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호무라의 의도가 일관적이었다고 볼 때, 반역의 이야기에서 있었던 호무라의 행동을 무엇이 유발한 것인지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순이 발견된다면, 앞서 내린 결론에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겠지만, 반대로 이 과정에서 체계적인 설명이 도출된다면 앞서 내린 결론의 타당성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① 우선 호무라에게 있어서 ‘마도카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킨다’는 단어 자체에도 상당히 많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 호무라가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했던 세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마마마의 설정상 마녀의 결계는 “마녀가 바라는 이상적 세계에서 마녀가 가장 원하는 것만이 흠결된 세계”입니다. 이는 곧,
마녀의 결계 = 이상세계 – 가장 원하는 것
라는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간단한 논리적 조작을 거치면
마녀의 결계 + 가장 원하는 것 = 이상세계
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런데, 반역의 이야기의 호무라의 결계는 본질적으로 마녀의 결계임에도 불구하고, ‘원환의 섭리’의 작용 및 ‘단방향 소통’만을 가능하게 한 큐베의 차단장치라는 두 요소 덕에, 호무라가 가장 원하는 대상인 ‘마도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로, 반역의 이야기에서 나타난 호무라의 결계 안 세계 자체가 호무라가 원하는 이상세계라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호무라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 마도카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 호무라 자신이 마도카와 같이하며, Ⓒ 다른 마법소녀들도 행복하게 사는 세계”
가 될 것입니다. 이 중 Ⓐ 마도카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엔 굳이 부연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와 Ⓒ은 그 다음의 문제였겠지요. 고로, 호무라가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마도카의 삶’이었다는 소결론이 도출됩니다. 본편과 비교해 보아도 이 결론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하지만, 본편 결말 이후의 세계에서 호무라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마도카의 삶’을 지킬, 방법도, 기회도 없었습니다. 또한, 본편에서 있었던 마도카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이 상태로도 나는 괜찮다’는 것을 호무라에게 알려줬으므로, 이 당시의 호무라는 [인간으로서의 마도카의 삶 ≒ 개념으로서의 마도카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이때의 호무라에게는 ‘인간으로서의 마도카의 삶’을 지킬 이유도, 의욕(또는 용기)도 없었습니다.
호무라가 본편 결말 이후, ‘마도카가 지키고자 했던 세계’를 수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입니다. 즉, 본편 이후의 호무라에게 있어 ‘마도카를 지킨다’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방침은 ‘마도카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유산’을 지키는 것, 즉 원환의 섭리는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역 중반까지 호무라가 원환의 섭리와 마도카를 사실상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 역시 이를 보여주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소결론을 내면, 이때까지의 호무라에게는 ‘마도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일관적으로 존재하였으나,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마도카의 삶을 지키는 것’으로 표출될 수 없었습니다. 그럴 이유도, 의욕도, 방법도, 기회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균형은 꽃밭에서의 대화에서부터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마도카에게 있어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개념으로서의 삶(?)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간혹 여기에 대해 ‘이 당시의 마도카는 개념으로서의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말을 위와 같이 해석한 것은 호무라의 실책이다. 어쨌든 마도카는 개념화하는 편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이는 곧 본편 결말 이후의 시점의 마도카에게는 개념으로서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삶보다 행복했음을 의미한다’라 반론하는 분이 계신데, 이러한 반론은 ‘다른 조건’이 미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제가 소주보다 맥주를 더 좋아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누군가 와서 “야, 너 소주가 좋냐, 맥주가 좋냐?”라고 평이하게 물어본다면, 전 당연히 맥주를 더 좋아한다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근데 너 맥주가 좋다고 대답하면 네 가족들이 다칠 거야. 다른 사람들은 네 가족을 도울 수 없고, 오로지 네가 소주가 좋다고 대답하는 것만이 가족을 구할 수 있어” 라는 조건을 붙여 말한다면, 저는 당연히 소주가 더 좋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대답을, ‘사실 넌 소주를 더 좋아했구나!’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에 봉착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본편 결말에서, 마도카의 두 선택 – 인간으로서의 삶이냐, 개념으로서의 삶이냐 – 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근데 너,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하는 걸 선택하면 발푸르기스의 밤이 계속 깽판을 칠거야. 오로지 네가 마법소녀가 되는 것(=개념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만이 발푸르기스의 밤으로부터 네 가족, 친구를 구할 수 있어” 라는 조건이 붙은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이 붙은 상황에서, 마도카가 ‘개념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 아무 조건도 붙지 않은 순수한 상황에서까지 마도카가 ‘개념으로서의 삶’을 선호할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엄청난 논리적 비약입니다.
다른 한편, 위 분석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마도카가 ‘개념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실제로 불행했냐 아니냐는 논의의 결론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가사 원환의 섭리 안에서 마도카가 사실상 인간으로 살 때와 다름없이 사야카, 나기사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가장 극단적으로 행복한(?) 해석을 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마법소녀 아닌 친구 그리고 가족과는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마도카가 꽃밭에서 진심을 말한 이상 “인간으로서의 삶 >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개념으로서의 삶”이라는 부등식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이러한 분석이 마도카와 호무라의 마지막 대화 – 질서 vs 욕망 – 과 모순되므로, 호무라가 오해한 것이 맞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질서냐 욕망이냐’는 질문과 ‘개념으로서의 삶이냐 인간으로서의 삶이냐’는 질문이 동일한 것이라 볼 수 없다는 재반박이 가능합니다. ‘욕망’의 반대쪽에 ‘질서’를 놓은 이상, 이미 ‘개념이냐 인간이냐’는 질문에 조건을 붙인 것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근거로 일반적으로 ‘질서와 욕망’의 선택지에서, 욕망을 선택할 사람은 드물 것이나, 그 ‘욕망’이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라는 조건이 붙는다면, 그 경우에까지 질서를 선택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임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마도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질서와 욕망’ 사이에서 질서를 선택했음에도, 거기서의 욕망이 ‘모두에게 잊혀지는 것’과 ‘평범하게 사는 것’으로 구체화된다면 얼마든지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해석하면, “그렇다면 호무라는 왜 꽃밭에서와 동일한 질문을 다시 던지지 않고, 단순히 욕망과 질서만을 물어본 것인가?”라는 추가적인 의문점이 발생합니다. 이 의문점을 해소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꽃밭에서처럼 질문을 던졌다가는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기껏 마도카가 기억을 되찾는 것을 막아 놓고서, 마도카가 기억을 되찾기 딱 좋은 설명들을 늘어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요. 또한, 호무라의 질문의 목적 자체가 달랐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호무라는, 그저 ‘마도카가 자기 세상을 긍정할까 부정할까’를 확인할 의도로 질문을 던졌고 봄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논의로 돌아가, 호무라는 이로써 ‘인간으로서의 마도카의 삶을 지킬’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방법도, 기회도, 의욕도 없었기에, 곧장 ‘인간으로서의 마도카의 삶을 지키는’ 행동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위험한 상황, 즉 마도카가 ‘개념으로서의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눈앞에 있기에, (개념으로서의 삶 >>> 죽음, 또는 이용당하는 삶임은 명백하죠) 일단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호무라는 ‘마도카를 지킨다’는 대원칙 하에, 일단 ‘마도카의 개념으로서의 삶마저 훼손되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는 단기적인 목표를 세웁니다. 이 단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호무라는 큐베로부터 마도카에게 ‘인간의 삶’을 되돌려줄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관측 가능하면 접촉할 수 있고, 접촉 가능하면 지배할 수 있다)
위 단기 목표는 ‘구원을 거부하고 스스로 마녀가 되어 자신을 희생한다’는 선택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마도카 일행이 호무라를 구원해 주게 되지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호무라는 마도카로부터 응원을 받고,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호무라는 호무라인걸) 마도카에게 ‘인간으로서의 삶’을 되돌려줄 의욕(또는 용기)을 얻습니다. (어떤 죄라도 짊어질 수 있어)
마지막으로, 마도카가 호무라를 원환의 섭리에 인도하기 위해 나타난 순간, 마지막 한 요소인 ‘기회’가 부여됩니다. ‘마도카를 지킨다’는 대원칙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하는 행위, ‘마도카에게 인간의 삶을 되돌려주는’ 것.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할 이유, 실천에 옮길 방법, 용기, 기회가 모두 마련된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는 호무라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호무라는 일관적이었던 대원칙에 따라 선택에 나아갑니다.
이 선택은, 지금까지의 호무라가 ‘마도카의 삶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마도카를 지켰던’ 것과는 반대로, ‘마도카의 삶이 (호무라의 관점에서) 개선되는’ 방식으로 ‘마도카를 지킨’ 최초의 것이 됩니다. 나아가 자신이 일관적으로 추구해 왔던 목적의 근간에 있는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호무라는 이를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 온’이라는 수식어를 활용하여 표현하는 것일 터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반역 직후, 호무라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① 마도카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② 호무라 자신이 마도카와 같이하며, ③ 다른 마법소녀들도 행복하게 사는 세계”의 세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광기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될 정도로, 호무라가 만족한 듯한 행동을 취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마도카와 대면하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호무라는 자신의 세계가 위 세 요소 중 최소한 ②만큼은 충족시키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호무라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호무라의 대원칙은 ‘마도카를 지키는 것’이고, 마도카가 그 대원칙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회복한 이상 자신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요.
4. 호무라의 부수적 의도 : 다른 인물과의 관계
3장에서, 마도카에 대한 호무라의 의도가 일관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호무라는 미치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도카에 대한 호무라의 일관적인 태도 자체가 넓은 의미의 ‘광기’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관적’이라는 단어는 어디까지나 방향성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호무라의 의도가 일관적이었고, 또 그 발단이 정당하다고 보더라도, ‘호무라의 의도가 반역의 이야기에서 지나치게 극단으로 치우쳐 정당화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본장에서 다룰 내용은, 바로 위와 같은 점에서, 호무라의 태도가 정당화 가능한 영역인지, 정당화가 불가능한 영역인지, 또 반역의 이야기에서 얼마나 극단화되었는지를 특히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4.1. 예전보다 더 악화되었다
주장 : 호무라는 본편에서보다 더욱 마도카 이외의 것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근거 : ① 호무라가 악마화함으로써 마도카 이외의 것들을 무시하고, 그것들에 피해를 주었으므로, 호무라가 마도카를 제외한 다른 가치에 대해 더욱 무관심해졌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를 통해, 호무라는 예전보다 더욱 극단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② 호무라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마도카의 행복을 원하는 것은 일견 이타적으로 보이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내 목표(=마도카의 행복)를 이루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반역의 이야기에서는 ‘다른 모든 것의 희생’을 요구하는 정도가 이전보다 훨씬 커졌기에, 그만큼 호무라가 극단으로 치우쳤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③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도 괜찮겠지’라 선전포고를 하는 것에서, 호무라가 마도카 이외의 것들에 대해 손톱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게 되었음이 드러납니다.
비판 : ① 이 주장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호무라의 악마화가 주변인물에게 피해를 입혔는가?’는 논제의 검토를 필요로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5장을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②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도 괜찮겠지’라는 대사의 맥락을 찬찬히 뜯어보면, 과연 저 대사가 광기의 표출인지 의심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 비판으로 제기됩니다. 바로 ‘세계 멸망’의 조건으로 ‘마수가 모두 멸망한 뒤’를 걸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어차피 멸망시킬 세계라면 무엇을 하러 마수를 먼저 처치하겠다는 것일까요?
TVA 마지막 및 반역 오프닝에서 호무라가 우주를 ‘절망과 슬픔만이 반복되는 세계’라 칭하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나듯, 마수는 인간이, 혹은 우주가 존재하는 한 결코 멸망하지 않는 존재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호무라의 위 발언은 ‘세계가 멸망한 후에는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곧 ‘나는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이 없다’는 문장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호무라의 위 발언이 타 요소에 대한 무관심을 표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는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마수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고, 단순히 호무라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는 데 ‘마수’ 내지는 ‘저주’가 도움이 되지 않기에, 이를 제거하려 했을 뿐이라는 재반박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재반박을 할 경우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저주를 제거했는데, 그걸 모두 제거하고 나면 세계를 멸망시킨다는 말’에 도저히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모순이 생겨버립니다.
4.2. 예전이랑 다를 바 없다.
주장 : 호무라는 주변인물에 대해 정확히 본편에서 보여준 것만큼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근거 : 이 주장은 단순히 ‘변화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으므로, 예전과 비슷한 것이다’는 점을 근거로 합니다. 따라서 4.1 또는 4.3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는 만큼 논지의 타당성이 약화되는 주장입니다.
4.3. 주변 인물을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주장 : 호무라는 본편에서보다 마도카 이외의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다.
근거 : ① 이 주장은, 만일 4.1.이나 4.2.에 따를 경우, 호무라가 마미와의 전투 직전에, 자신이 타인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을 후회하는 듯한 독백을 했던 장면, 그리고 무방비상태였던 토모에 마미의 급소를 피해 공격한 장면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점을 첫 번째 근거로 합니다.
② 한편, 호무라가 정말로 다른 인물들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호무라의 세계에서 다른 마법소녀들에게 그렇게 우호적일 이유가 없다는 점도 근거로 듭니다. 쿄코나 마미는 그렇다고 쳐도, 자기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위협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사야카나 나기사에게 행복을 줄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 : ① 이에 대한 비판으로, 호무라의 독백은 그저 ‘그런 후회가 드는 것 자체가 싫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곤 합니다.
② 또한, 다른 마법소녀들에게 우호적인 것이 오히려 마도카의 행복추구에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됩니다. 사야카와 나기사가 위협요소가 되는 것은 맞지만, 이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이들에게 행복을 줘서 굳이 자신의 세계에 의문을 가질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견해의 전개 : 제 견해는 4.2와 4.3의 중간 정도에서 주기적으로 왔다갔다하고 있으나, 반역 BD를 두어 번 더 돌려본 결과 4.3, 즉 주변 인물을 더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쪽에 가까워진 상태입니다.
① 재반론에서부터 시작하면, 일단 비판 ①은 뒤이어 호무라가 마미의 소울 젬을 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장면에 한정하지 않고서라도 반역 내내 호무라가 마도카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조금은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는 점(예컨대, 쿄코에게 끌어들여서 미안하다고 한다거나, 마미와 쿄코를 믿는 모습을 모인다던가)을 감안하면, 비판으로서의 힘이 약화됩니다.
② 한편, 호무라가 정말 다른 사람들에 대해 더 무관심해졌다고 한다면, 호무라가 ‘세상에 흩뿌려진 저주를 없애겠다’고 선언한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집니다. 단순히 큐베에 대한 복수가 목적이었다면, 굳이 위와 같이 선언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③ 또한, 호무라가 반역을 한 부수적인 이유 중 하나로, ‘쿄코와 마미의 구출’이 위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강논거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마도카 강림하는 도중, 호무라는 쿄코와 마미가 ‘마도카의 존재를 확인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합니다.
이때, 쿄코와 마미가 ‘마도카를 확인’했다는 것은, 만일 현재의 시스템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큐베의 다음 목표가 쿄코와 마미가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호무라가 악마화하지 않았다면, 큐베는 인간 감정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할 것이니, 계속 인간의 감정을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 낼 것입니다. 그런데, 큐베가 호무라와의 대화에서 스스로 말한 것처럼, ‘마도카라는 존재를 아는’ 것은 원환의 섭리 연구를 매우 쉽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마도카라는 존재를 모르는’ 마법소녀를 실험체로 사용한다면, 큐베는 외부에서 온 것들 중 어느 것이 원환의 섭리인지 찾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큐베는 다음 실험체로 ‘마도카의 존재를 아는’ 쿄코와 마미를 선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 실험방법이 호무라에게 했던 것보다 훨씬 비인간적이고 잔인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호무라가 악마화 직전, ‘마도카의 모습을 확인하는’ 쿄코와 마미를 곁눈질로 보는 연출은, 바로 호무라가 위와 같은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함으로써, 반역의 결심을 굳히는 데 (아주 작게나마) 일조를 하게 만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④ 새로 개편된 세계에서, 호무라가 마미의 찻잔과 쿄코의 사과를 떨어뜨린 행위 역시 4.3.에 따를 때 가장 잘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4.1이나 4.2에 따른다면, 쿄코와 마미에게 한 일은 그들에게 해를 끼칠 것을 경고하는 행위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특히 쿄코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의문점을 발생시킵니다. 호무라가 쿄코에게 한 행동을 정확히 설명하면, “쿄코가 호무라의 사역마들에게 사과를 주고 있었다 – 클라라 돌즈들이 쿄코에게 사과를 달라 요청한다 – 쿄코가 클라라 돌즈에게 사과를 던져준다 – 호무라가 클라라 돌즈들이 사과를 받지 못하게 만든다” 가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행위는 ‘쿄코에게 해를 끼칠 것’을 알린다기보다는, ‘쿄코의 호의를 받지 않을 것’ 내지는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마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찻잔을 떨어뜨린 행위가 ‘마미가 주는 차를 더 이상 받지 않을 것’ 또는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호무라의 위 행위는 ‘위협’이라기보다는 ‘자책’에 가까운 의미를 띠게 됩니다. 호무라의 마음이라 해석되는 일이 잦은 클라라 돌즈들이, 오히려 호무라에게 토마토를 던져 맞추는 장면 역시 자책이라 해석될 수 있다는 점도 상관적으로 고려해볼 법 합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악마화 된 이후의 호무라의 심리상태는 ‘죄책감은 느끼지만 그냥 안고 간다. 후회하지 않는다’가 될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5.4)
물론,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모호한 장면의 해석은 주요논거로는 사용될 수 없을 것이나, 보강하는 측면에서는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해석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저는 위와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호무라가 이전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 쪽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물론, 이 의견은 상대적인 평가이기 때문에 제 의견에 따르더라도 ‘나아져 봤자 여전히 미친 상태이다’는 결론을 내는 것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제 의견을 받아들이더라도, -100에서 –99가 되었을 뿐이니 여전히 음수라는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제 의견에 따를 경우 불가능해지는 주장은 ‘호무라는 반역에서 뜬금없이 타락했다’는 것뿐입니다.
5. 다른 쟁점들의 검토
5.1. 들어가는 말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쟁점들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하려면, 우선 제가 철학박사 학위부터 따야 할 것입니다. 그건 저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이기 때문에, 주요 쟁점들에 한한 만연한 검토에 그치려 합니다.
5.2. 주요 쟁점 1. 호무라는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혔는가?
호무라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주장은, 대체로 ‘마도카를 가두었다’, ‘마도카의 의지를 무시했다’, ‘다른 마법소녀들과 일반인들도 가두었다’는 정도로 요약됩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는 그 비판보다 상대적으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이 쟁점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서술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①. 자유의 박탈 : 지금 맥락에서 ‘가두었다’는 것은, ‘자유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상 가두었다고 주장하는 분들께서는, 호무라가 마도카를 비롯한 다른 마법소녀들의 자유를 박탈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곤 합니다. 마법소녀들은 호무라의 세계 안에서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자유의 제한’이라는 것이 언제나 윤리적으로 나쁜 행위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자유의 제한’이 타당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가치를 종합적으로 비교형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봅시다. 제가 어떤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다른 사람이 그런 저를 어떻게든 그 직장에서 빼내고 싶어한다고 가정해 보고, 여기서 세부조건을 조금씩 조정해 나가면서 그때마다 결론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 기본형 : 제가 노동강도가 높지 않고, 적절한 임금을 받는 직장에 자발적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X라 합시다)이 난데없이 저를 그 직장에 근무할 수 없게 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제 자유를 정당하게 제한’했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 정당한 목적 : Ⓐ의 예시에서, X의 동기가, 제 자리를 빼앗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위와 같은 자유의 제한이 정당할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 저를 알 수 없는 위험요소에서 구하기 위해 X가 위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자유의 제한이 정당화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한 상태에서도, X의 목적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결론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특성과 관계 : Ⓐ의 예시에서, 제가 미성년자이고, X가 제 부모님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 경우, ‘부모님에게 무슨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는 생각에, 위 제한을 정당화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명백히 부당하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류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날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간섭의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것이지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두 사람간의 관계에 따라 오히려 ‘간섭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타당한’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범죄조직에 가입하려 하는 사람을 막지 않는 부모, 또는 친구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 제한당한 자유의 성질과 크기 : Ⓐ의 예시에서, 저를 직장에서 강제로 내쫓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며칠 동안 강제로 유급휴가를 보낸 것이라면, X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이 경우, 제가 박탈당한 자유는 말하자면 ‘고강도의 노동을 할 자유’, 조금 추상화하면 ‘더 가혹한 운명을 선택할 자유’인데, 이런 형태의 자유마저도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심지어 마도카의 세계개편도 마법소녀들의 ‘마녀가 될 자유’, ‘구원을 포기할 자유’를 제한한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 자유의 제한으로 얻는 이익 : Ⓐ의 예시에서, 제 직장을 인간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의 노동을 하면서도, 간신히 식비만 감당할 정도의 임금을 받는 곳으로 바꾸어 봅시다. 이 경우, 인권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저를 직장에서 강제로 빼낸 X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서와 달리, X가 제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제가 얻는 이익이 질적, 양적 측면에서 모두 커지니까요.
Ⓕ 다른 방법이 있었나? : 이는 Ⓔ의 경우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에서, X에게 저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거나, 회사 사장과 근무강도를 낮추는 합리적인 근로계약을 새로 체결하게 만들어 줄 방법이 있었고, 그런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저를 강제로 빼낼 때에 비해 X에게 손해가 없었다면, 인권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X의 행동을 섣불리 정당화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방법이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저를 계속 근무하게 하는 것’과 ‘저를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의 두 방법만 남아있었다면, 굳이 인권을 중시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X의 행동이 최소한 ‘비난받을 만큼 부당하지는 않다’고 평가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의 제한이 있었다고 해서 곧바로 그 행위가 그르다는 평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 정당/부당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자유를 제한한 목적, 자유를 제한한 사람과 제한당한 사람 각각의 특성과 둘의 관계, 자유를 제한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는지 여부, 제한당한 자유의 성질과 크기,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그 사람이 얻은 이익의 성질과 크기를 비롯한 모든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울질을 하고 난 결과는, 저울질을 한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저울질을 해 보지도 않고 단순히 “자유의 박탈” => “무조건 허용 불가!” 라고 생각하셨다면, 한번쯤 진지하게 앉아 양쪽의 무게를 달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위 방법에 따라, 마도카에게 있어 자유의 박탈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해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3장에서의 견해에 따라 호무라는 Ⓑ ‘마도카의 (행복)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즉, 수단이 타당했는지와는 별개로, 목적 자체는 정당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편 호무라는 마도카와 Ⓒ 친구관계에 있고, 둘 모두 미성년자입니다. 부모자식의 관계보다는 간섭이 정당화될 여지가 적지만, 남남보다는 분명히 크며, 성인인 경우보다 간섭이 조금 더 넓게 허용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편, 마도카가 상실한 자유는 먼저 Ⓓ 원환의 섭리의 과정을 ‘자신이 직접’ 수행할 자유입니다. 이 자유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꽃밭에서의 대화’ (그리고, 이 대화과정에서 호무라가 회상하는 본편 1화의 대화 – 너는 너의 가족과 친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그리고 반역 이후의 세계에서 마도카가 신의 모습을 되찾으려 할 때 “역할이 있다”고 표현한 점을 감안하였을 때, 마도카는 ‘원환의 섭리의 역할을 자기 손으로 수행하는 것’을 자유가 아닌, 의무에 가깝게 받아들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도카가 빈 소원의 본질은 ‘마법소녀들이 마녀가 되지 않는 것’이지, 그 과정에 ‘자기 자신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카에게 있어 “‘자신이 직접’ 원환의 섭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유”는 앞서 말한 ‘가혹한 운명을 택할 자유’, ‘자신을 학대할 자유’에 해당하므로, 이것이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마도카가 상실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유는 Ⓓ 앞으로의 행동 자유가 될 것입니다. 즉, 호무라가 마도카를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가능성을 높게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호무라가 정말로 마도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하고 싶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마도카에게 곧장 ‘욕망이 우선이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작업에 돌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무라는 오히려 마도카가 ‘질서가 우선’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아가 마도카가 적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곧 호무라가 마도카를 직접적으로 조종할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시사합니다. 보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의 이유를 근거로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마도카의 각성이 보통 ‘위화감’을 매개로 일어난다는 것은 작품에서 간접적으로 제시된 바 있습니다. 이는 호무라가 마도카를 과도하게 통제하려 하면, 오히려 마도카가 위화감을 느껴 각성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호무라에게, 마도카를 최대한 자연스러운 상태로 놔두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마도카가 앞으로 행동의 자유를 제약당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한편, 마도카가 자유의 제한의 대가로 얻은 이익은 Ⓔ 인간으로서의 삶을 회복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상이하게 갈릴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사람일수록,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는 엄청나게 클 것이고, ‘세속을 벗어남’이라던가, 삶 자체를 고통으로 보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일수록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는 0으로 수렴하거나, 심지어는 음수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때, 저는 ‘인간으로서의 삶’이란 가치를 매우 중대한 것으로 평가하는 입장에 가깝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하단 ‘자기참고’의 네 번째 링크를 참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제 관점에서 마도카가 얻은 이익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막대한 것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마도카가 얻은 이익이 인간으로서의 삶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도카가 실제로 얻은 이익은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 – 개념으로서의 삶의 가치” 만큼입니다. 때문에, 개념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크게 평가하시는 분이라면 마도카가 얻은 이익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3.4.②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처럼, “인간으로서의 삶 >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개념으로서의 삶” 이라는 부등식이 성립하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점을 고려하더라도 저는 마도카에게 막대한 이익이 있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큐베의 모순된 시스템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가족과, 마법소녀 아닌 친구들과 다시 만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향유하는” 이익을 얻었다고 판단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반박이 더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마도카가 회복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인위적인 것이므로,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박입니다. 하지만, 세 단락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호무라가 마도카를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하고 있다기보다는, 마도카가 자유롭게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우주를 마련해 준 것에 가깝습니다. 기억의 재구성은 어디까지나 새로 만들어진 우주를 유지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유일한 예외라면 마도카의 가족을 3년간 미국으로 보냈던 것인데, 마도카의 가족이 호무라의 개편의 최대 수혜자라는 점, 이 역시 결국은 마도카가 ‘당연히 가져야 했던’ 것을 되찾은 것이라는 점에서, 오로지 이 사정만으로 마도카가 회복한 삶의 가치 전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새로운 우주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억 재구성마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면, 마도카의 세계도 그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이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재반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마도카의 세계는 정당한 이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재반박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최소한의 기억재구성은 허용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재반박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억재구성도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의 포기에 가까울 뿐 아니라, ‘호무라의 세계는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재구성이 정당하지 않고, 따라서 호무라의 세계는 정당하지 않다’는 순환논리에 빠지는 오류가 있습니다.
둘째 재반박은 “마도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호무라는 지극히 의도적이었기 때문에 둘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재반박에도 문제점이 있습니다. 마도카는 “자신의 행동으로 기억조작의 결과가 발생할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 그 결과의 발생을 용인”했으므로 이른바 ‘미필적 고의’의 요건을 모두 충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마도카에게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면, 마도카와 호무라의 기억조작간의 차이는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는 항상 허용되고 하나는 항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분법적 결론을 내는 것이 차단되고, ‘어떤 수준을 경계로 하여 허용과 비허용을 가릴 것인가?’는 질문에 답을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진행되는 논의가 바로 그 ‘어떤 수준’을 찾는 작업입니다. 때문에, 위와 같은 재반박은 논의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것 외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더불어, 마도카가 회복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의 보강논거로 ‘호무라의 세계는 불안정하다’는 문장을 활용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체계의 불안정성은 그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기 어렵다는 점에 이 주장의 맹점이 있습니다. 만일 안정성을 절대적인 판단기준으로 삼아버리면, ‘비합리적이고 불안정한 체계보다, 비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체계가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곧 ‘부분적인 거짓보다 완벽한 거짓이 낫다’는 주장과 다를 게 없어집니다. 반대로, ‘합리적이고 불안정한 체계보다,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체계가 낫다’고 볼 경우, 불안정한 세계를 파괴하여 더욱 불안정하게 될 가능성을 감수하느니 ‘불안정성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즉, 체계의 안정성 문제는 체계 자체의 합리성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주제이므로, 체계 자체의 합리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지금 원용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호무라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느냐와 관련해서, 저는 (최소한 마도카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 호무라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호무라에게는 ‘원환에 이끌려 간다’ 와 ‘반역한다’라는 All-or-Nothing의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도카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마도카와의 소통을 거쳐 마도카에게 부과된 무거운 책임을 덜어준다는 일은, 실현가능성이 0인 일입니다. 반역 이후에, 마도카의 기억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느냐는 주장 역시, 마도카에게 기억을 되돌려주는 즉시 그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현가능성이 없습니다. 즉, 호무라에게는 양자를 절충할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호무라에게 절충안이 주어져 있었음에도 호무라가 극단적인 반역으로 나아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비난할 이유가 되겠지만, 그런 기회 자체가 구조상의 모순으로 인해 주어지지 않았다면, 단지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 자체만으로는 호무라를 비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펴본 Ⓑ~Ⓕ를 종합적으로 보아, 호무라의 개편이 마도카에게 피해가 되었다, 혹은 마도카에 대해서도 정당화가 불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분석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각각에 적용해 본 결론을, 쟁점이 될 만한 부분과 함께 간단하게만 제시해 보겠습니다.
먼저, 쿄코와 마미의 경우, 위 4.3.의 사실, 즉 ‘마도카의 세계가 유지되었더라면 쿄코와 마미는 더욱 잔인한 실험을 감내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 주 논거가 되어, 호무라의 개편에 피해를 봤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나기사의 경우는 마도카와 비슷한 이유로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한편, 마도카의 가족은 ‘잃어버린 딸을 되찾았다’는 점, 그리고 마도카와 호무라는 제외하면 마도카의 가족이야말로 마도카의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호무라의 개편에 가장 큰 수혜자입니다. 큐베의 경우 호무라의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자임에 분명하지만, 누가 신경을 쓴답니까?
문제가 되는 부류는 둘, ‘다른 마법소녀 및 일반인’과 ‘사야카’입니다. 다른 마법소녀들이나 일반인들에 있어서는, 호무라의 세계나 마도카의 세계나 직접적으로 간섭받은 바가 없고, 두 세계에서 딱히 삶의 양태가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기에, 일단 현재의 시점을 기준으로는 피해도, 이득도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간섭을 받을 가능성’만큼은 호무라의 세계에서 월등히 높습니다.
한편 사야카의 사례는 대체로 마도카와 유사하지만, 첫째로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 수단이 더욱 극단적이었다는 점, 둘째로 호무라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점, 셋째로 앞으로 자유를 추가적으로, 더 본질적인 부분까지 박탈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중 첫째는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만, 둘째 문제, 그리고 특히 셋째 문제는 쉽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의견에 따르면, 호무라의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모두 “앞으로의 가능성”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호무라가 사실상의 독재자로 군림하게 된 데에서 오는 필연적인 부작용일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지금까지 호무라에게 아주 우호적인 논리를 전개해 왔음에도, 그 세계 자체를 최종적으로 긍정하는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호무라를 부정하는 논리와 결론에 있어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호무라의 세계를 긍정하지 못하게 된 근거가 주로 ‘앞으로의 가능성’에 있다는 말은, 한편으로 ‘호무라가 앞으로 불필요한 간섭은 일체 하지 않는다’는 (비현실적인) 가정만 있다면, 호무라의 세계를 조심스럽게나마 긍정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제 의견에 따를 때, 호무라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마도카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방안보다는, “호무라의 앞으로의 간섭가능성을 차단하고”, 나아가 호무라의 극단적 행동의 씨앗이 되었던 문제, “마도카와 소통할 기회, 마도카와의 사이에서 해결방안을 절충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는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이, 우주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도출됨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다른 쟁점들을 추가로 살펴본 뒤에, 5.5. 및 결론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5.3. 주요 쟁점 2. 호무라에게는 권리가 없었다는 주장
작중에서 사야카가 명시적으로 말한 것처럼, 호무라는 아무런 권리도, 권한도 없는 상태에서 강제로 세계를 개편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호무라의 세계를 비판하는 주요 논거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우주의 원리는 새로 쓰려면 이러이러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이 있을 수가 없으므로, ‘우주의 원리를 새로 쓸 권리’가 정당하게 누군가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주를 개편하는 주체가 누구이든 간에, 그 자는 권리 없이 우주를 개편한 것이 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주를 개편할 당시의 마도카에게 역시 우주 전체를 대표할 형식적 권리는 없었고, 심지어 마법소녀 전체를 대표할 형식적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도카의 세계개편이 정당하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마도카의 개편이 ‘마법소녀들의 최후를 조금이라도 덜 비극적이게 만들고 싶다’는 보편적인 윤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족으로, 이는 곧, 마도카의 개편은 위 ‘보편윤리’가 적용되는 집단인 인간의 입장에서만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큐베의 입장에서 보면, 마도카는 정당한 권리도 없이 멋대로 우주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에 불과하겠지요.) 이 사실은, ‘세계 개편의 형식적 권리’의 유무는 그 개편 자체의 정당성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추단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세계개편의 정당한 권리가 없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하여 호무라의 세계를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정당한 권리 없는 개편이 모두 부당하다 한다면, 똑같은 이유로 마도카의 세계까지 비판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호무라의 세계에 대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세계개편의 정당성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권리 없는 세계개편’이라는 비판은, ‘정당성 없는 세계개편이다’는 주장이 선행된 다음, ‘그런데 권리마저 없었다’는 보충적인 논거로 사용될 수 있을 뿐, 독자적인 주요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때, 호무라의 세계개편이 보편적 윤리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음은 명백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도카의 세계개편은, 마법소녀 모두를 가혹한 운명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를 추상화하면, ‘모든 인간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 주겠다’는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한편, 마도카의 이러한 인식은 큐베의 극단적 공리주의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발달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호무라의 세계개편은 다름이 아니라 “마도카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삶’을 모두 상실한 유일한 존재인 마도카 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 주겠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마도카는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호무라는 ‘마도카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모든 인간’과 ‘마도카 한 사람’의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파악하는 순간, 우리는 큐베의 극단적 공리주의에 대항할 방어수단을 상실하게 됩니다. 큐베는 저 말을 들은 즉시 이런 식으로 환영하겠지요.
“드디어 내 말을 이해했구나. 네 말대로야. 카나메 마도카라는 사람이 신과 같은 성스러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카나메 마도카 한 사람의 삶이라는 가치는 수많은 다른 인간의 삶이라는 가치보다 저열해. 정확히 같은 논리로, 개체 하나의 희생으로 종족 전체의 이익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그 개체의 희생은 정당화되는 게 아니겠어?”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호무라의 세계개편이 마도카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도카의 보편윤리가 실현되지 못했던 부분 – 마도카 자신의 인간다운 삶 – 을 메꾸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단, 이렇게 본다면 ‘그렇다면 호무라가 왜 악마인데?’ 라는 반문이 나올 법 합니다. 이 반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지금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마도카의 세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무라는 작중 대사에서 보이듯 마도카를 거의 절대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호무라가 자신을 악마로 칭하는 주요한 이유는,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내가 신에 가까운 존재인 마도카에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본절에서의 논의는 호무라가 자신을 악마로 호칭한 것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습니다.
5.4. 주요 쟁점 3. 호무라는 성장하였나? 정체하였나?
호무라의 성장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호무라의 행동이 호무라 자신이 가진 사랑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떼를 쓰는 어린아이’의 행동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아, 호무라가 정체하였거나, 오히려 퇴보하였다는 분석을 제기합니다.
‘세속과 개인의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성장으로 보는 입장에 따를 경우에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호무라는 세속과 자신의 사랑에 매몰되어 행동에 나아갔으므로, 이는 오히려 퇴보가 되며, 심지어는 세속을 벗어나 진정한 성장을 이루었던 마도카를 인간으로 다시 끌어내림으로써 마도카에게까지 퇴보라는 굴레까지 씌웠다는 것입니다.
반면, 호무라의 성장을 긍정하는 입장 중 하나는, 호무라가 ‘운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는 측면에 관심을 가집니다. 본편에서의 호무라는 어디까지나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 마도카를 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입니다. 반면, 반역의 이야기에서 호무라는 주어진 시스템 자체의 모순 – 마도카의 두 결심 : 가족과 친구와 함께 살고 싶다는 결심과, 마법소녀를 구하고 싶다는 결심이 양립할 수 없는 상황 - 을 직시하고, 이 모순 자체를 깨부수는 선택을 합니다. 본편에서 마도카의 성장이
“신념(마법소녀가 되고 싶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의 정립 -> 현실적 장벽(마미의 죽음)에 직면 -> 구조적 모순(마법소녀 시스템 자체)의 확인 -> 구조적 모순을 타파”
는 순서로 이루어진 것과 일치하게, 호무라 역시
“신념(마도카를 구하고 싶다)의 정립 -> 현실적 장벽(발푸르기스의 밤)에 직면 -> 구조적 모순(마도카가 원환의 섭리로만 존재할 수 있는 우주 자체)의 확인 -> 구조적 모순을 타파”
라는 과정을 겪었으므로, 그 신념 자체의 당/부당과는 별개로, 호무라가 적어도 성장을 이룬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위 과정에서 호무라가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모두 감수했다는 점은 또한 ‘성장 =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라 보는 관점에서 호무라가 성장했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만약 호무라가 어린아이로 퇴보한 것이라면, 호무라는 당장 마도카가 질서가 소중하다고 말하는 시점에서 더더욱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아갔어야 하고, 다른 마법소녀들과 작별을 고하는 듯한 행동을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호무라는 정반대로 자신이 행한 행위에 따른 결과 – 악마를 자처하고, 마도카를 포함한 마법소녀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것 – 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그 자체가 호무라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참고사이트의 ‘니체 사상의 적용’에 따르면, 호무라는 종래 ‘마도카의 희생’으로 대표되는 기존 윤리체계에 철저히 복종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역의 이야기에서 호무라는 반역을 통해 그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체계를 부수고, 새로 고치는 행위로 나아갑니다. 이는 곧 니체가 말하는 초인으로의 각성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한편, 이 의견이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철학적 사상을 억지로 가져다 붙였다는 비판으로부터 상당 부분 자유로울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반역의 이야기 내에서 니체를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상징적 요소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클라라 돌즈들의 ‘신은 죽었다’, 반역 이후 호무라의 탁자 기둥에 박혀 있던 마녀 문자가 이에 해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호무라가 반역을 한 행위는, 본편에서 마도카의 어머니가 마도카에게 “성장”을 주제로 해준 조언과 상당히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호무라가 반역의 이야기에서 성장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호무라의 성장을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자기 행위의 결과를 알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이는 것, 그 신념을 위해서 기존의 시스템의 모순을 조각내 버리는 것은 분명한 성장이라 할 것이고, 여기에는 (비록 그 신념을 실현하는 수단의 극단성에 가려졌지만,)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단점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도 고려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장의 바탕이 되는 신념의 옳고 그름은 ‘성장의 당부’ 문제이지, ‘성장의 존부’ 문제가 아니므로, 호무라의 신념이 틀렸다는 반박이 제기되더라도 호무라가 성장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을 것이고요.
5.5. 주요 쟁점 4. 세계는 발전하는가? 퇴보하는가?
마마마의 세계가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주장은, 마마마의 작중 세계관이 점진적으로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나아가고 있음을 골자로 합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사용하는 ‘발전’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본편에서의 변증법적 발전은
“정 : 큐베의 극단적 공리주의 시스템”
“반 : 마법소녀의 희생을 허용할 수 없다”
“합 : 마도카의 세계”
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에너지 회수의 효율성을 상실하는 대신 마법소녀들의 희생이 가지는 비극성을 완화되는 절충된 세계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다시 반역의 이야기에서
“정 : 마도카의 세계”
“반 : 마도카의 희생을 허용할 수 없다”
“합 : 호무라의 세계”
로 다시 한 번 정반합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을 이른바 ‘변증법적 발전’이라 부를 수 있으려면, ‘합’의 세계에 정과 반이 절충된 요소가 존재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호무라의 세계가 전적으로 마도카의 세계를 흔적도 없이 파괴한 결과 탄생한 것이라면 이는 겉으로만 정반합의 과정을 뿐,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한편, 변증법적 발전은 ‘합이 정 또는 반보다 항상 우월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단 절충이 성립되면, 절충안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변증법적 발전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무라의 세계에는 분명히 ‘원환의 섭리’가 존재하고, 원환의 섭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마법소녀를 최후의 절망에서 구제하는 것’은 그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즉, 마도카의 모든 의도가 호무라의 세계에서 무위로 돌아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반역의 이야기에서 마마마의 세계는 이른바 ‘변증법적 발전과정’이라는 큰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역에서의 전개가 ‘세계의 퇴보’라는 주장을 하려면, ‘호무라의 세계는 마도카의 세계보다 명백하게 열등하고, 명백하게 발전가능성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고, 몇 가지 추가적인 쟁점을 검토하면, 자신 있게 위와 같은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아집니다.
5.2.에서는 호무라의 세계가 전체적으로 보아 피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반대로 5.3.에서는 호무라의 세계가 역설적으로 마도카의 행동의 바탕에 있는 정신의 마지막 한 조각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호무라의 세계는 ‘책임의 정당한 분배’라는 측면에서 마도카의 세계보다 바람직합니다. 마마마의 세계관 안에서, 마법소녀가 큰 절망에 빠져 마녀가 되는 것은 큐베의 책임이지 마도카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도카가 재편한 세계에서 ‘마법소녀를 절망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희생’이라는 책임은 큐베가 아닌 마도카에 지워져 있습니다. 사야카가 말했던 것처럼, ‘노력한 사람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도카의 세계는 올바름을 창조해내기 위해 가장 노력한 마도카에게 대가를 주기는커녕, 정반대로 마도카의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마도카의 세계는 ‘책임의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입니다.
반면 호무라의 세계에서, 마도카는 ‘인간으로서의 삶’이라는, 당연히 마도카가 누려야 했던 것을 돌려받습니다. 반대로, 큐베는 호무라에게 응징을 당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마법소녀를 절망으로부터 구제’하는 역할은 인간으로서의 마도카가 떨어져 나온 원환의 섭리가 수행하게 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호무라의 세계에서 오히려 각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발전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호무라의 세계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도카의 개편 이후에도 마법소녀 시스템이 가지는 본질적인 문제는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마도카는 마법소녀들이 마녀가 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조금 더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는 해 주었지만, 여전히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 마도카의 개편을 위해 사용된 수단인 ‘큐베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 자체가 ‘마법소녀 시스템’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스템 자체를 완벽하게 뜯어고치는 것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호무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호무라는 ‘사랑’이라는 전혀 다른 수단을 동원하여, 마법소녀 시스템에서 벗어나 (소울 젬을 깨물어 부수는 연출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습니다. 이를 달리 보면, 마도카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했던 본질적인 모순의 해소가, 호무라의 세계에서는 실현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한편, 이와 같은 해석방식을 차용하면 엔딩곡의 배경이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대의 은의 정원’이 흘러나오는 동안, 마도카의 실루엣은 왼쪽에서, 호무라의 실루엣은 오른쪽에서 춤을 춥니다. 이때, 이들이 춤을 추는 장소를 보면, 마도카는 자연 속에, 호무라는 도시 가운데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미와 인공미, 이는 각각 마도카와 호무라의 우주를 비유하는 적절한 단어라 할 것입니다. 각 쌍의 속성, 부작용, 절충안이 매우 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엔딩곡의 마지막에 호무라와 마도카가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는 연출을 넣은 것은, 이 양자간의 진보적인 절충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의미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호무라의 세계를 놓고 ‘퇴보하였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6. 결론
모든 것을 종합하여, 호무라의 세계에 대한 제 평가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호무라는 ‘마도카를 지키겠다’는 일관적인 의도 하에 결계 안에서 나름대로의 성장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큐베의 음모를 비롯한 현실적인 상황은 마도카와 소통할 기회, 절충안을 물색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성장의 결과는 매우 극단적인 방법인 ‘반역’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인물은 일단 ‘현재로서는’ 오히려 반역 이전의 세계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또한 호무라의 세계에는 마도카의 세계보다 ‘정의롭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일부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무라의 세계를 완전히 긍정할 수 없는 것은, “독재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호무라의 세계에 발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호무라의 세계는 오히려 마도카의 세계보다 더 큰 발전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호무라의 세계 자체를 부정하고 마도카의 세계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호무라의 세계를 기초로 변증법적 수정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마도카가 이루고자 했던 보편적 윤리에 더욱 가까워지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열쇠가 되는 인물은 다름 아닌 사야카입니다. 사야카는 ‘현재 시점’에 한정해서 보았을 때도 ‘호무라의 행동 때문에 명백한 피해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이는 곧 호무라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유인이 있는 인물이 사야카뿐임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본편과 반역의 이야기에서의 사야카의 포지션으로 보면, 사야카는 호무라의 세계가 부작용을 낳게 된 근본적인 모순 - ‘소통과 절충의 기회 부재’ - 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발전의 노력이 오히려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호무라의 세계 자체를 부정하더라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후속작에서 이 마법소녀들이, 특히 사야카가, 우주를 두 번 개편하고 나서도 여전히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큐베 시스템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고, 최종적으로 ‘꿈, 희망, 사랑, 정의’와 같이,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의미에서 부끄러운 기분이 들게 만드는 가치들이 실현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를 바라며, 호무라의 반역은 마도카의 개편과 마찬가지로, 그 최종적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산통의 과정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처음 마법소녀물을 극단적으로 비트는 것으로 시작했던 마마마가, 최종적으로 ‘희망에 가득 찬 마법소녀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나?’를 살피는, 이른바 ‘마법소녀의 창조신화’로 귀결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하지만 각본가가 우로부치잖아? 안 될 거야 아마…….
(사족 : 저 ‘안 될 거야 아마’에 성질이 나서, 제 멋대로 반역의 이야기의 후속작을 상상해 2차창작 소설을 휘갈겨 써 보았습니다. 참고 사이트 최하단의 링크가 그것입니다.)
7. 참고한 사이트
시간이 지나면서 삭제되거나 누락된 페이지도 적지 않고, 내용만 스크랩해 둔 페이지도 상당히 되기에, 여기 적시된 페이지가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지인들과의 대화는 여기에 적히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지인의 번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일본어 웹의 링크는 대부분 누락되어 버렸습니다.)
[호무라의 정신상태에 대한 다양한 분석]
http://wiki.puella-magi.net/The_Rebellion_Story/Spoiler#Homura.27s_State_of_Mind
[호무라에 대한 다양한 의견 집합]
http://www.reddit.com/r/anime/comments/1sda3v/spoilers_madoka_rebellion_discussion_or_can/
[니코니코 대백과 번역본]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29/read?articleId=19383436&objCate1=&bbsId=G005
[호무라의 의도, 성장 등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
[호무라의 내면이 분열되었다는 의견]
[호무라에 의도, 성장 등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29/read?articleId=19396624&objCate1=&bbsId=G005
http://www.reddit.com/r/homura/comments/1sb1fs/the_official_rhomura_rebellion_discussion_thread/
[호무라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평가]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30/read?articleId=20761391&bbsId=G005
[절충설에 가까운 의견]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29/read?articleId=19408676&objCate1=&bbsId=G005
[마도카와 준코와의 대화의 적용]
http://wiki.puella-magi.net/The_Rebellion_Story/Spoiler#Junko.27s_Words_of_Wisdom:
[니체 사상의 적용]
http://wiki.puella-magi.net/The_Rebellion_Story/Spoiler#.22Gott_ist_tot.22_and_Nietzsche_.5B8.5D
http://todayhumor.com/?animation_215274
[정반합, 균형, 원환의 섭리]
http://www.reddit.com/r/anime/comments/1s2akw/spoilers_madoka_magica_rebellion_us_premier/
[4Chan 스레드 모음집]
http://wiki.puella-magi.net/Threads#Third_Movie_Threads
[(인도식) 불교사상의 적용]
http://mlpomo.blogspot.kr/2013/08/latin-latin-madoka-more-latin-puella.html
[Magia의 반역적 해석]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29/read?articleId=20601378&objCate1=&bbsId=G005
[루시퍼와 연결지은 해석]
http://wiki.puella-magi.net/The_Rebellion_Story/Spoiler#Fallen_Angel_Homura:
[루시퍼 해석과 호무라 변질설에 대한 반박]
http://wiki.puella-magi.net/The_Rebellion_Story/Spoiler#Alternate.2C_Non-Dualist_Theory
[환상교향곡과 연결지은 해석]
http://todayhumor.com/?animation_211437
[플라톤의 사랑 분류와 연걸지은 해석]
http://todayhumor.com/?animation_146006
[마마마 웹코믹들에서 드러나는 간접적인 해석]
http://blog.naver.com/suyeongkorea
[일본 마마마 위키?]
http://www22.atwiki.jp/madoka-magica/pages/278.html
[관련인물들의 인터뷰 정보를 주로 참조한 사이트]
[기타 이글루스, 네이버 블로그 등지에 올라왔던 많은 리뷰글들을 간접적으로 참조하였으나, 링크를 보존하지 않아 누락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 적을 수 없는 관련 사이트들의 댓글, 정보글, 리뷰글]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은 수많은 정보들]
[자기참고]
(다소 긍정적인 해석)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29/read?articleId=19390734&objCate1=&bbsId=G005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29/read?articleId=19396354&objCate1=&bbsId=G005
(지인과의 대화록)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29/read?articleId=19484536&objCate1=&bbsId=G005
(마마마의 윤리성에 대한 글)
http://gaia.ruliweb.com/gaia/do/ruliweb/family/230/read?articleId=18695578&objCate1=&bbsId=G005
(반역 이후의 이야기에 대한 2차창작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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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나니 추천 한 백개쯤은 달아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되는군요... 저랑 생각하는게 거의 비슷하신데 말빨이 딸려서 달리 표현할만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죠ㅎㅎ 솔직히 처음 스포만 접했을 땐 호무라의 행동에 대해 거의 부정적인 시각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호무라가 왜 그랬을까를 계속 생각해보고 또 직접 반역의 이야기를 보기까지 하니 충분히 이해가 가더군요. 그리고 호무라가 쿄코랑 마미를 곁눈질로 확인했다는 것을 얘기하시는 대목에선 무릎을 탁 쳤던게 확실히 마도카의 존재를 알게 된 두 사람이라면 포기를 모르는 영업사원 큐베가 다음 타깃으로 삼기 적당하죠. 이건 전에 생각해 본 일이긴 해도 저 연출이 호무라가 그것을 깨달았다고 까지 연결 짓지는 못 했으니; 아무튼 저도 방법의 차이가 있지만 호무라는 여전히 마도카바라기이며 본질은 바뀌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보다 더 다른 이를 생각해주게 됐다는 것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호무라가 성장했다는 것에도 어느정도 수긍은 하지만 역시 타인과의 특히 마도카와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라 이 부분만큼은 성장했다 보기 힘들거 같군요;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고 홀로 무거운 짐을 안고 가는 것은 더해졌음 더해졌지 나아지질 않았으니.. 호무라가 한번 더 성장하기 위해선 타인과 소통을 하는 법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걸 먼저 배워야하질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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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면서 느낀게 그동안 마마마반역 게시물에 올라온 호무라비판글을 이분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캡쳐했을지도 모른단 소름끼침이었습니다....뭐 아래 링크에서 보셨다면 할말은 없지만.... 보통 호무라를 비판하는 분들중 가장 많이 보이는게 "사랑"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호무라의 사랑은 사랑의 본질, 곁에 두고 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며 속박하지 않는단 논리죠. 그런데 그런 사랑의 예는 TVA 에서 사야카를 통해 처참하게 박살났습니다. 사랑의 이상론 따위, 소녀가 큐베한테 영혼을 대가로 이룬 소원만큼 현실의 괴리 앞에 무참히 박살나는 뜬구름이죠. 염월이란 분이 올린 기시물에 "반역"이 TVA의 결말에 대한 반역이란 결론을 내렸는데 애초에 TVA자체도 종래의 마법소녀 이상론을 큐베를 내세워 반역해 버린 스토리였습니다. 왜냐면 마도카가 개편한 우주에서도 마법소녀의 끝은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채 죽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마도카는 한개의 소원, 당장 큐베에게 이용당하는 마법소녀들의 근로환경을 개선하는게 우선이란 제한된 선택지 내에서 최선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최선은 우주의 엔트로피를 감수하며 큐베와 마법소녀 자체 를 없애는 거였는지도 모르지만.... 이번 반역은 TV편에서 보여진 마도갓의 숭고함에 감화된 나머지 그 개편된 세계도 한계가 있다는걸 깨우쳐주는 우로부치의 짱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편에선 호무라의 우주가 가진 한계를 가장 처절하게 보여주며 마도카식 해결책을 다시 제시해 주겠죠. 위 댓글에 우로부치가 끝난이야기 다시 하는걸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이 반역편은 꽤 괜찮게 뽑혔습니다. 용두사미로 만들진 않을거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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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이야기에서 마도카가 직접 자기 입으로 "아무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라고 합니다. 100% 본심이라는 감독의 확인사살도 있었고요. 그렇게 힘들더라도 그게 더 행복하다는 관점이신게 아니라면 말씀하신것들 전부 본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니 다시 읽어보시는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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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무라가 초심을 잃었냐 하면 호무라가 처음부터 좀 이런 기질이 보이긴 했습니다. 일단 소원 빌때부터 마도카를 구해달라는 소원이 아닌 "마도카를 지키는 내가 되고싶다"라는 소원을 빈데다가 아무리 마도카를 위해서라곤 해도 마도카가 겪을 상심따윈 고려하지 않고 마도카의 소꿉친구(=사야카)를 죽일려고 까지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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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래서 반역 보고 저도 뭔가 눈이 번뜩하고 뜨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그전부터도 몇 분들은 정말 저래도 좋은가는 의문을 제기하셨지만.. 사랑은 그저 상대를 존중해주며 속박하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호무라의 사랑을 그저 상대를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붙잡아두는 이기적인 독점욕일 수도, 상대를 위해 모든걸 희생할 정도로 헌신적인걸로 볼 수 있는게 애초에 사랑은 여러가지 빛깔이 있다고 생각되는지라... 이것 또한 사랑의 일부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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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무라가 초심을 잃었냐 하면 호무라가 처음부터 좀 이런 기질이 보이긴 했습니다. 일단 소원 빌때부터 마도카를 구해달라는 소원이 아닌 "마도카를 지키는 내가 되고싶다"라는 소원을 빈데다가 아무리 마도카를 위해서라곤 해도 마도카가 겪을 상심따윈 고려하지 않고 마도카의 소꿉친구(=사야카)를 죽일려고 까지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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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이야기에서 마도카가 직접 자기 입으로 "아무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라고 합니다. 100% 본심이라는 감독의 확인사살도 있었고요. 그렇게 힘들더라도 그게 더 행복하다는 관점이신게 아니라면 말씀하신것들 전부 본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니 다시 읽어보시는걸 권합니다 | 14.04.06 18: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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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래서 반역 보고 저도 뭔가 눈이 번뜩하고 뜨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그전부터도 몇 분들은 정말 저래도 좋은가는 의문을 제기하셨지만.. 사랑은 그저 상대를 존중해주며 속박하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호무라의 사랑을 그저 상대를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붙잡아두는 이기적인 독점욕일 수도, 상대를 위해 모든걸 희생할 정도로 헌신적인걸로 볼 수 있는게 애초에 사랑은 여러가지 빛깔이 있다고 생각되는지라... 이것 또한 사랑의 일부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싶어요. | 14.04.06 19: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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