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 밖에서 마시는 것도 좋잖나?"
후유츠키 "아, 네."
"자네는 유능하긴 한데, 사람 사귀는 걸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여."
"죄송합니다."
"그런데 후유츠키, 생물 공학에 대해 흥미로운 레포트를 쓴 학생이 있던데, 이카리란 학생을 아나?"
후유츠키 "이카리? 아뇨?"
"내가 자네 말을 좀 했더니, 꼭 만나 보고 싶다고 그러더군. 곧 자네에게 갈 걸세. 잘 좀 부탁혀."
"이카리라고 하셨죠. 알겠습니다."
후유츠키 "이거, 읽어 봤네. 몇 가지 의문점이 있긴 한데…굉장히 흥미로운 레포트였어."
유이 "감사합니다."
"이카리 유이라고 했지?"
"네."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취직? 아니면 연구소에서 활동?"
"아직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 거기다 제3의 선택도 있지 않습니까?"
"응?"
"가정을 꾸리는 것도 생각하고 있답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요."
"……."
후유츠키 코조, 교토 대학 형이상 생물학 전공 교수이다. 사람 사귀는 걸 즐기는 타입은 아니나, 2001년, 동료 교수 소개로 이카리 유이라는 학생을 만난 이후 좀 변했다. 그를 만나려 한 것은 유이 쪽이 먼저였는데, 아마 그의 연구가 E-계획에 꼭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 사실을 몰랐던 후유츠키는, 그녀의 명석함, 상냥함, 그리고 당당함 등에 매력을 느껴, 전공도 비슷할 겸 사적으로 교류하며 유이와 친분을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겐도우 "어떤 인물에게서, 당신의 소문을 들었거든요.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후유츠키 "술에 취한 채 싸웠다고, 의외로 어리석은 녀석이구만."
"남에게 호감을 사는 건 잘 못합니다만, 미움 받는 건 익숙해 있죠."
"……."
그러던 어느 날, 후유츠키에게 경찰서에서 전화가 한 통 왔다. 로쿠분기 겐도우라는 사람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잘 알고 있었다. 같은 학교 학생인데다, 나쁜 의미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알고 봤더니 술에 취해 누군가와 싸우고는 신분 증명이 되지 않자 자신을 보증인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아는 누구에게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단다. 그 땐 그냥 넘겼으나, 지나고 생각해 보니 유이가 가르쳐 줬을 테다. 얼마 후 유이와 산을 오르던 중, 그녀의 애인이 로쿠분기라는 것을 알고 그는 크게 놀랐다. 들리는 바로는 유이의 배경이 보통이 아니라, 능력도 재력도 없던 겐도우가 흑심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했단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 많았는데, 유이는 후유츠키를 보며 다들 모를 뿐, 겐도우도 알고 보면 참 귀여운 사람이라고 했다.
유이 "어머 후유츠키 선생님, 그 사람 알고 보면 아주 귀여운 남자랍니다."
후유츠키 "모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구만."
다시 얼마 뒤, 세컨드 임팩트가 발발한다. 후유츠키는 교수 자리를 잃고 자격증 없이 의사 활동을 하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 그러다 UN(이라는 이름의 제레)의 요구에 의해, 남극 조사단에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를 추천한 사람이 겐도우였다. 탐사 당시 겐도우는 이미 제레 멤버의 자제인 이카리 유이와 결혼을 마친 상태였다.
겐도우 "지금은 이름을 바꿨습니다."
후유츠키 "엽서? 명함이 아니고?"
저희 결혼했어요. 이카리 겐도우, 유이.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시죠?
"……!"
놀라는 것도 잠시, 도저히 운석 충돌이라 판단할 수 없는 남극의 상태와, 겐도우에 대한 불신 등으로 후유츠키는 겐도우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곧 제레라는 조직, 그들의 음모, 또 세컨드 임팩트가 결코 사고가 아니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어, 겐도우에게 모은 자료를 꺼내며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겐도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게히른 본부로 데리고 갔고, 에반게리온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본 그는 완전히 압도되어 게히른에 힘을 보태게 된다. 물론 사실은, 후유츠키는 겐도우를 경멸하고 있었고, 따라서 호기심만을 근거로 그의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이후 15년이란 시간 동안, 후유츠키는 겐도우의 한 손이 되어 그의 충실한 부하 역할을 맡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겐도우 옆에 남게 만든 것일까? 혹시, 이 모든 게 이카리 유이의 힘은 아니었을까?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흐릿한 설정 중 하나가 바로 유이의 진짜 동기이다. 본 리뷰에서는 유이가 초호기에 흡수된 것이 사고가 아니라 본인의 의지였음을 이미 설명했으나, 그 이유를 명확히 짚지는 않았다. 유이는 어째서 스스로 초호기 안에 들어간 것일까? 또 그 위험한 접촉 실험 장소에 굳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왔던 이유는 뭘까? 그녀가 바라는 서드 임팩트는 어떤 것이었나? 초호기와 함께 영원히 우주에 남는 것도, 그녀의 목적이었을까? 지금 이 많은 질문에 대해, 작품의 단서를 통해 제대로 고찰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유이 타입의 보완 계획은 이미 리뷰 4편에서 오리지널 타입이란 제목으로 언급한 바 있으나, 굳이 유이 타입이라고 칭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진정한 동기 및 의도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시작하자.
우선 유이가 초호기에 흡수된 것이 사고가 아니란 사실은, 거의 명백한 진실이나, 여전히 해당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 따로 짚어 본다.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게 바로 21화에 나왔던, 후유츠키와 유이의 대화 장면이다. 2003년, 신지가 3살 때, 그러니까 접촉 실험 얼마 전 일이다. 장소는 하코네 북쪽 지역에 있는 아시 호수(하코네 호수)로, 23화에서 레이가 알미사엘과 함께 자폭을 선택했던 곳이었다. 우선 유이의 말을 들어 본다.
후유츠키 "이 나라에서 가을이 사라진 건 참 아쉬운 일이지.
제레가 가지고 있는 사해 문서….
그 시나리오 대로라면, 10여 년 후엔 반드시 서드 임팩트가 발발한다…."
유이 "최후의 비극을 막기 위한 조직. 그게 바로 제레와 게히른이죠."
"나는 자네의 생각에 찬동할 뿐, 제레가 아니야."
자, 여기서 잠깐. 우선, 제레의 사해 문서에 따르면, 서드 임팩트는 반드시 발생한다. 앞선 리뷰에서 설명한 대로, 구체적으로는 사도가 아담과 결합하여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칭한다. 그 비극을 막기 위해, 게히른은 제레의 힘을 뒤에 업고 에반게리온을 제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미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유이의 계획이 제레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이는 제레 멤버의 딸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레의 멤버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유이는 제레의 의도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여기서 말하는 제레의 의도라는 게, 그저 에반게리온을 사용하여 사도를 막는 것인지, 아니면 제레 타입 A, 즉 사도를 무찌른 후 릴리스를 이용하여 속죄 의식을 치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유이나 후유츠키나 인류를 지키는 계획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답은 후자 쪽일 것이다. 유이가 속한 제레가 일단, 릴리스 속죄 의식을 계획하는 중, 생각 차이가 있던 유이가 그 계획에 반하는 다른 타입의 인류 보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두 계획이 갈리고 있다는 걸 후유츠키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유이 "후유츠키 선생님, 그 봉인의 세계를 푸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후유츠키 "자료는 전부 이카리에게 넘긴 상태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말이네."
여기서 유이가 말하는 ‘봉인의 세계’란, 표면적으로는, 세컨드 임팩트를 제레가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사실을 말한다. 후유츠키의 대사 또한, 그가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비밀을 캔 후, 그 자료를 이카리에게 넘겼던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유이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비밀이 또 하나 있다. 유이의 대사가, 후유츠키의 ‘내가 지지하는 건 제레가 아니라 너야.’에 대한 반응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 후유츠키는 유이가 사실 제레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을 말로 꺼낸 후유츠키에게, 그녀는 지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가자.
"……."
후유츠키 "…전과 같은 짓은 이제 하지 않아."
"거기다, 어떻든 경고도 받고 있는 중이고.
그들에게 나 한 사람 쯤 세상에서 지우는 일 정도야 전혀 문제도 아닌 모양이니 말이네."
유이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렇죠.
간단해요. 사람을 없애는 것은."
후유츠키 "그렇다 해도, 굳이 자네가 실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었다고."
유이 "모든 것은 흐름 대로예요. 저는 그것을 위해 제레에 있는 거니까요.
…신지를 위해서."
우선 후유츠키가 말한 ‘전과 같은 짓’이란, 제레의 비밀에 대해 캐고 다니는 행동일 테며, 곧 그의 대사는 본인 역시 그 행위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소리인 동시에, 유이와 겐도우가 속한 제레 및 게히른에게 완전히 뜻을 굽히고 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이 대사 바로 전에 잠깐의 침묵이 있는데, 화면이 비추는 후유츠키의 시선이 꽤 미묘했다. 중앙에 잡힌 것은 신지도, 유이의 얼굴도 아니고 그녀의 가슴 주변이다. 에반게리온의 연출 기법을 생각해 보면, 이 부분은 후유츠키가 유이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장면이겠다. 다음, 유이의 마지막 대사, 익숙하지 않나?
카오루 "알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 내가 지금 여기 있잖아."
"모든 것은 리린의 흐름 대로."
24화에서, 타브리스가 이 말을 그대로 했다. 유이는 지금 ‘목숨을 걸고’ 실험에 임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사실 신지를 위한 것이란다. 그런데 같은 대사를 쳤던 타브리스 또한 ‘목숨을 걸고’ 신지를 구하기 위해 ‘제레를 배신’했다. 따라서 우리는 유이의 의도가, 후의 카오루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의지 관철을 위해 제레를 배신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제레라는 거대 조직 속에서 배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사실, 유이의 접촉 실험에는 커다란 의문점이 하나 있다. 어째서 그렇게 빨리 실험을 진행했어야 하나? 당시, 초호기는 여전히 릴리스의 육체에 붙어 있는 상태였다. 사도가 오는 것도 14년은 더 흘러야 한다. 유이는 명색이 제레 유력 멤버의 자제였고, 게히른의 수장인 겐도우의 아내였고, 아들은 이제 겨우 3살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목숨을 걸고 벌써, 유이는 실험을 속행하려는 걸까? 그렇다. 어차피, 죽게 될 운명이니까.
"……."
유이는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제레는, 유이가 뜻을 달리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 같다.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그녀 스스로 곧 들킬 거라고 예상한 것 같다. 제레의 능력 정도면 충분한 일이다. 후유츠키가 그 비밀을 살짝 언급했을 때 유이가 당장 경고를 준 것도 같은 의미였으리라. 이렇게 놓고 보면 유이가 그렇게 코어 실험을 서둘렀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녀에겐 시간이 없었던 거다. 이는 후에 네르프의 진실을 알게 된 카지가, 사랑하는 미사토에게 위험을 안겨 줄 것을 걱정해 스스로 호랑이 굴에 가 목숨을 버렸던 것과 다르지 않다. 유이 역시 본인의 의지를 지키기에 앞서, 사랑하는 가족, 겐도우와 신지의 목숨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 했던 셈이다. 후유츠키가 밝힌 대로, 제레에게 사람 한 명 없애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그렇기 때문에 유이는 공식적으로 실험 대상이 되어 희생양 역할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 말은 곧, 유이의 접촉 실험은 제레를 포함하여 외부에는 철저히 ‘사고’라고 알려야 했다는 소리이다.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초호기 안에 ‘숨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당장 제레 쪽에서 겐도우를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비밀은, 유이와 후유츠키,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심지어 겐도우도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유이의 이런 비밀을 아무도 모르게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후유츠키를 14년이라는 긴 시간 겐도우 옆에 머물러 있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수 있다.
후유츠키 "사람은 살아가려는 의지를 가진 것에 그 존재 의의가 있다."
후유츠키 "…그것이, 스스로 에바에 남은 그녀의 바람이니 말일세."
말한 대로, 겐도우는 유이의 진짜 의도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육체 샐비지 프로젝트를 통해 어떻게든 그녀를 초호기에서 다시 꺼내고 싶어 했다. 물론 유이는 명백히 본인의 의지로 에바에 남아 있었고, 그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육체 일부는 꺼내 주었다. 어떻게 보면 겐도우가 레이라는 개체를 만들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최대한의 배려였던 셈이다. 과연 유이는 겐도우의 향후 행동 방향까지 계산했던 모양이다. 잔인한 일이어도, 겐도우가 이렇게 유이의 마음을 모른 채 그녀를 절실히 원한다는 사실 자체가, 제레에게서 남편과 아들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23화에서 후유츠키는 레이를 더러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내 절망의 산물인 동시에 겐도우 자네의 희망이기도 하다.” 겐도우의 입장에서 레이라는 존재는, 유이가 다시 그와 만나고 싶어 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후유츠키는 유이가 절대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귀환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육체 부분만 겐도우에게 넘겼던 의미 역시 잘 알았을 것이다. 유이에게 레이란, 영원히 인간의 형태를 버리겠다는 의지 표현과도 같으므로.
후유츠키 "난 죄 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가 되길 바라네."
유이의 죽음 이후, 후유츠키는 오랜 시간 겐도우의 한 손인 동시에 유이의 유지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그 또한 유이를 사랑하니까. 다시 유이와 만나야 하니까. 그가 바라는 세상은 곧, 유이가 원하던 세상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떳떳하게 계속 살겠다는 것. 죄라는 게 그 이름을 얼마나 많이 더럽히든, 사람은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지옥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라고. 누누이 말한 대로, 에반게리온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부분이다.
겐도우 "이 아이는 세컨드 임팩트 이후를 살게 되는 건가? 이 아이는, 그 지옥을…."
유이 "어머, 삶의 의지만 있다면, 어떤 곳이든 천국이 될 수 있다구요.
살아 있기만 하면, 행복의 찬스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약속의 날, 그녀의 모습.
코어 실험 당일이다. TV판에선 화면에 비추지 않았으나, 리뷰 10편에서 언급한 완전판 23화에선 숨은 장면이 등장한다. ‘다이브 슈트’를 입고 있는 유이의 모습. 코어 접촉 실험을 위해 특수 제작한 옷이라고 한다. 등에는 날개 비슷한 것을 달고 있는데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후유츠키 "유이, 오늘은 자네 실험이잖아!"
유이 "그래서예요. 제 아이에게 밝은 미래를 보여 주고 싶거든요."
나오코가 말한 대로, 저게 유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우선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녀는 지금 코어 접촉 실험이, 곧 인류의 밝은 미래와 같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녀의 계획이 제레의 릴리스 속죄 계획, 나쁜 말로는 인류 멸망 계획과 그 궤를 전혀 달리 한다는 암시가 된다. 그런데 유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인류의 희망이라 여겼던 걸까? 그녀가 신지에게 보인 것은, 스스로 에반게리온이 되는 과정이었다. 즉, 에반게리온이라는 방주에 타서, 그 안에 담긴 의지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그녀가 말하는 인류의 밝은 내일이었다. 인류의 조상인 릴리스의 육체로 새롭고 완전한 삶을 얻는 것. 에바 초호기라는 명칭은 따라서, 새로운 인류의 모습 그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녀는 ‘영원한 삶’에 집착하는가? 유이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세상에 살았던 여성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조직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나의 의지를 침범할 수 없는,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후유츠키에게 말한, ‘인류 멸망이 간단한 세상’이 아니라, ‘누구도 나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세상’을 원했던 것 같다.
기획 단계의 겐도우
여기서 잠깐 겐도우 얘기를 하고 가자. 그는 어떤 보완을 원했나? 그는 도통 다른 사람을 믿지 않고, 사랑할 의지도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미움 받는 것에 익숙한 남자라, 그런 자신에게 마음을 연 유이라는 여성은, 그에게 있어 단 하나의 천국이었다. 그래서 힘이 들면 언제나 그녀에게로 도망을 쳤던 것이다. 사실 겐도우의 본래 성인 로쿠분기는 ‘육분의(바다에서 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관측 도구)’라는 뜻으로, 이카리 유이, 즉 ‘단 하나의 닻’에 장착한 이후로 영원히 머무르려 하는 그의 마음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다른 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남편의 그런 폐쇄적인 성격을 걱정한 유이는 아마 미래에 다시 그와 만나 직접 마음의 보완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따라서 유이의 희생은 결국, 겐도우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3년 만에 만난 아들을 보는 아빠의 시선
그러나 겐도우는 아내의 깊은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아들에 대한 처사이다. 그는 정말 신지를 미워하는 걸까? 나는 최소한, 겐도우 역시 처음엔 보통의 아버지와 같이 신지를 사랑했을 거라 믿는다. 당장 신지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바로 겐도우 아니었던가. 그러나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인 유이가, 자신을 두고 후에 아들이 타게 될 초호기 안에 숨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그는 두렵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은 곧 신지에 대한 애꿎은 미움의 발로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버린 채 신지를 택하는 것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을 버릴 수 없는 위치에 서고자, 그녀가 이브가 되겠다면 억지로 아담이 되어서라도 그녀 옆에 서고 싶었던 게다. 그 원대한 꿈을 핑계로, 신지 또한 자신과 같이 마음 구석에 보완의 욕구를 남겨 두길 바랐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물론 아내의 사랑도 진심으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애정 표현도 그 수준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다시 코어 실험 현장으로 가자. 유이는 도대체 왜, 신지를 코어 실험 현장에 데리고 온 것일까? 인류의 밝은 미래를 보인다는 넉살 좋은 핑계가 있어도, 그 광경은 신지에게 다만 큰 트라우마를 주었을 뿐이며, 그의 어두운 성격 형성에 큰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성 강한 유이가 그 위험을 몰랐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신지에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려 했던 것은 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진짜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다.
아마 유이는 신지가, 엄마는 초호기 안에 담겨 있단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랐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나 뿐인 아들에게, 너는 엄마 없는 아이가 아니며, 나는 언제나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메시지’를 넌지시, 전하려 했던 것 같다. 유이 본인의 의지가 초호기 안에 남아 있을 거란 사실을, 신지에게 직접 말할 순 없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제레가 알면 안 되었다. 그러니 유이는 신지 스스로, 언젠가 이 안에 담긴 엄마를 찾아 주길 간절히 원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이 날의 실험은, 유이에게 있어 아들 신지와의 말 없는 약속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이는 신지가 제3도쿄에 온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엄마의 ‘따스함’을 가르쳐 주려고 했다.
신지 "엄마…?!"
유이가 파일럿이나 더미 없이 초호기를 움직인 경우가 두 번 있었다(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 번은 엔드 오브 에바에서 베이클라이트를 뚫고 신지와 함께 의식 장소로 향했을 때. 그 땐 신지가 엄마의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호기가 움직인 즉시 그게 엄마의 의지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번의 경우인 1화의 사건 때는 상황이 좀 달랐다. 유이는 혼자 힘으로 초호기를 움직여 신지를 구했으나, 그 때의 신지는 그 거대한 로봇 안에 엄마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런데 레이를 품에 안고 망설이던 신지가 잠깐 초호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자세히 살피면 에바의 눈에 조용히 불이 켜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엄마가 따뜻한 목소리로 ‘원하는 대로 하렴.’이라 다독이는 느낌이다. 신지가 마음을 돌려 초호기에 타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눈빛’이, 신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당시의 신지도 이미 ‘심층적’으로는, 엄마를 지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이 "이제 괜찮니?"
신지가 초호기 안에 유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 계기는 16화에서 나왔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 신지는 꿈을 꾸는 듯이 초호기 속 엄마와 만날 수 있게 된다. 어린 신지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 선 어머니 유이. 신지가 두 손에 사탕 비슷한 것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뭐라고 말하는 장면을 주목하라. 흑백 처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있는 구슬이 붉은 이유는 의도적인 강조 연출이겠다. 나는 저 동그란 구슬이, 초호기의 코어, 즉 유이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라 봤다. 마치 신지는 지금, 엄마와 노는 어린 신지의 모습이 되어 “봐요 엄마, 내가 드디어 엄마를 찾았어!”라 기쁘게 외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유이의 대답.
"그래…다행이구나…."
BGM Opening of Dream (Piano, Leave it to Version)
신지를 위해, 그녀는 초호기에 남았다. 커다란 재앙이 지구를 휩쓸었고, 지구의 멸망은 또 다시 가까워 오고 있다. 남은 사람들은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죽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에반게리온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현실의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다. 제레의 경우 사이비 종교라고 부르면 딱 좋을, 속죄 의식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유이는 반대로, 살기 위해 움직였다. 유이는 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본인이 옳다고 믿는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천국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유이의 궁극적인 목적, 진정한 유이 타입의 보완이다.
신지 "하지만 엄마는…엄마는 어떡하실 거예요?"
그리고 유이는, 인류라는 존재를 부끄럽게 여기는 제레에 반하여, 인류가 살았다는 ‘자랑스러운 증거’를 남기기 위해, 우주에 영원히 남을 것을 결심했다. 제레의 속죄가 감히 지울 수 없는 영원한 ‘흉터’를 새기고 싶어서, 외로움을 각오하고 그녀는 코어 실험에 임했던 게다. 마지막에 신지는 인류의 보완을 거부하고, 에반게리온 안이 아닌, 세상 바깥에서 살 것을 원했다. 확실히 신지는 유이를 꼭 닮아, 따뜻한 마음을 가진 동시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제법 강단이 있었다. 유이는 그런 아들이 진작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다. 사실 솔직한 욕심으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아니 최소한 신지하고만은, 함께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어머니도, 아들의 성숙과 독립을 말릴 수 없는 법이다.
후유츠키 "인간이 신을 모방해 에바를 만든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 그것인가?"
유이 "네, 사람은 이 별에서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에바는 무한히 살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의 마음과 함께."
"설령 50억 년이 지나도, 이 지구도 달도, 태양마저 사라져도 남을 거예요.
…단 혼자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굉장히 쓸쓸해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유이는 아들과 작별의 시간을 갖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 직접 그 상징이 되겠다던, 오래 전 스스로와 했던 숭고한 약속은 꼭 지키고 싶었다. 신지를 정말 사랑하지만, 굉장히 보고 싶을 테지만, 아들은 어느 사이 저렇게 커서는 엄마 품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러니까, 이제 괜찮은 거다. 정말로.
유이 "이제…괜찮은 거지?"
"안녕히 계세요, 엄마."
[에반게리온] 33. 보완에 이르는 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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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레, 토요일 늦은 밤에 33편 들고 오겠습니다. 재밌게 읽어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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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죄 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가 되길 바라네." 이해하기 힘든 에반게리온이라는 내용에서... 저 한마디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솔직한 마음.. 그리고 에반게리온 이란 작품에 바라는....대사였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말이죠. 아무쪼록 저 대사는 저 개인적에게는 명대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엄교수님.... 다음편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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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 서브컬쳐물에 관한 의견에 대해선 동감입니다만, 제레의 사고방식을 단지 유아기적인 꼴통적인 사고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좀 그렇군요. 제레의 사고방식도 놀랍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합리성이 존재합니다. 인간이 성숙해도 자신이 죄를 짓고 살고 있지 않은가하는 어느 정도 한 번씩은 생각해볼만한 것을 너무 깊게 들어간 게 제레의 패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죄라는 것은 생각했던만큼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심도 있게 다루죠. 죄는 모든 살아있는 것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특성 중 하나라고. 그렇다면 이 것을 모두 없애고 깨끗한 상태로 시작하느냐 혹은 이것들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느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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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면 파괴해버리겠다!"는 유아기적인 사고방식이 개인차원으로 구현되면 꼴통이 태어나고, 사회나 국가차원으로 구현되면 파시즘과 대량학살이 태어나지요. 제레의 중2병적인 주장에 대비되는, 후유츠키 교수의 '죄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를 바란다는 말이 참 묵직합니다. 근데 정작 요즘 인기를 끄는 일본 서브컬쳐물들은 제레 노인들의 사고방식을 더 따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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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가 하려던 말도 '죄' 또한 인간의 조건들 중 하나고, 그걸 억지로 정죄하려고 들다가는 비극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죄가 있으니 다 죽어야 한다는 제레같은 사고방식은 딱 더도말고 덜도말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랑 똑같죠 억지로 죄를 없애고 깨끗한 상태로 시작하느냐, 아니면 짊어지고 나아가느냐는 차이가 없는게 아니라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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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죄 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가 되길 바라네." 이해하기 힘든 에반게리온이라는 내용에서... 저 한마디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솔직한 마음.. 그리고 에반게리온 이란 작품에 바라는....대사였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말이죠. 아무쪼록 저 대사는 저 개인적에게는 명대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엄교수님.... 다음편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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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봐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 | 13.02.15 0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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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면 파괴해버리겠다!"는 유아기적인 사고방식이 개인차원으로 구현되면 꼴통이 태어나고, 사회나 국가차원으로 구현되면 파시즘과 대량학살이 태어나지요. 제레의 중2병적인 주장에 대비되는, 후유츠키 교수의 '죄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를 바란다는 말이 참 묵직합니다. 근데 정작 요즘 인기를 끄는 일본 서브컬쳐물들은 제레 노인들의 사고방식을 더 따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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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 서브컬쳐물에 관한 의견에 대해선 동감입니다만, 제레의 사고방식을 단지 유아기적인 꼴통적인 사고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좀 그렇군요. 제레의 사고방식도 놀랍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합리성이 존재합니다. 인간이 성숙해도 자신이 죄를 짓고 살고 있지 않은가하는 어느 정도 한 번씩은 생각해볼만한 것을 너무 깊게 들어간 게 제레의 패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죄라는 것은 생각했던만큼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심도 있게 다루죠. 죄는 모든 살아있는 것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특성 중 하나라고. 그렇다면 이 것을 모두 없애고 깨끗한 상태로 시작하느냐 혹은 이것들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느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 13.02.15 00: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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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가 하려던 말도 '죄' 또한 인간의 조건들 중 하나고, 그걸 억지로 정죄하려고 들다가는 비극이 펼쳐진다는 겁니다. 죄가 있으니 다 죽어야 한다는 제레같은 사고방식은 딱 더도말고 덜도말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랑 똑같죠 억지로 죄를 없애고 깨끗한 상태로 시작하느냐, 아니면 짊어지고 나아가느냐는 차이가 없는게 아니라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 13.02.15 02: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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