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방영한 12화에서 이나호를 사살하는 것으로 결국 찌질이로 낙인 찍혀버린 사신 슬레인이었죠.
작중에서 박쥐라는 표현을 들으면서 작외에서까지 그러한 표현으로 까이는 모양인데, 어쨌든 슬레인과, 그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캐릭터를 대조해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해보겠습니다.
화성인은 모두 적이야
레예 아리에쉬. 카이즈카 이나호가 아니라, 이 소녀 쪽이야말로 슬레인의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거울에 비치면, 정반대인 것을 제외하곤 전부 똑같이 보이듯, 슬레인과 레예는 서로를 거울에 비친 듯한 캐릭터들이죠.
슬레인은 지구 태생으로, 망명한 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화성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반면 레예는 화성 태생으로, 잠입한 스파이인 아버지를 따라 지구에서 자라게 되었죠.
이는 이후 행적에서도 고스란히 정반대의 성향과 상황으로 나타납니다.
은근 귀엽게 나온 슬레인
슬레인은 화성이란 타지에서, "지구인"이라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박해 받았습니다.
사실 1970년대에 화성에 이주해서 그 다음 수십년간 지구가 지원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고생 속에 크릴이나 클로렐라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이니 지구가 미울 만도 합니다만, 작중의 모습은 그저 어쩌다가 알드노아 가졌다고 우쭐대는 멍청이들일 뿐.
그나마 자신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여주는 유일한 인물인 공주를 모셨고, 그것은 이후 공주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레예의 경우는 (타지에서 박해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구인이 아닌 화성인으로서 결코 지구인으로 섞여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정확하게는 그녀의 아버지와 동료들은) 공주를 죽임으로서 지구-화성간의 전쟁을 재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고, 실제로 암살을 기도했고, 성공한 셈이죠.(암살이란 그 사람을 진짜 죽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 목적이니 사실상 성공)
그 다음부터는 더더욱 정반대의 행보를 보입니다.
슬레인은 감정적인 면을 보이면서 이성적이고 침착한 이나호와 상반되는 듯이 묘사되었었죠.
하지만 레예는 슬레인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작품 중반까지의 레예는 상당히 쿨한 모습이었고(아버지랑 있을 때는 잘 웃었던 걸 보니 원래 성격은 아직은 모름) 화성인 태생이지만, 지구인으로서 화성에 맞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화성인에게 맞서 싸우지 않겠니?
하지만 레예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건 슬레인도 마찬가지였죠.
슬레인은 지구인 태생으로서, 화성군 병사로 지구인을 죽일 것을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점이라면 레예에겐 화성인에 대한 분명하고 맹렬한 분노가 있었지만, 슬레인은 딱히 지구인을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그 정도겠군요
"화성인은 모두 적이야"
하지만 슬레인은 지구인을 죽이는 걸 망설이고, 레예는 화성인을 죽이는 걸 오히려 나서서 했다는 점일까요. 위에서 쓴 말과 중복되는 듯하군요.
어쨌든 작품이 클라이막스로 치닫기 전에는 둘은 이런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이었습니다.
공주가 어디 있는 지 애타게 찾아다니면서
공주의 안전을 위해서, 보통 사람 같으면 트라우마가 생겨서 몇년은 꼼짝도 못할 것 같은 고문을 당하면서까지도 절대 공주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죠.
반면 레예는 공주에 대해서 호감이 있진 않았습니다.
자신이 한 짓이 원인이라는 걸 아는 것일 수도 있고, 만약 정체 들키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숨 졸이며 숨어 있는 것에 대한 동병상련 같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화성인은 전부 적이야"
그 말인즉슨, 그 시점까지는 지구인 소녀로 변장하고 있었던 어세일럼 공주에 대한 것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지구인인 척 하는 화성인인 자신 역시, 이곳에 있는 지구인들에겐 적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본편을 보셨으면 다 아시는 내용이니 그것까지 주절주절 떠들진 않겠습니다)
허나, 정작 화성의 어세일럼 공주는 알드노아를 기동시키며 화성인이란 걸 커밍아웃까지 했지만 받아들여졌죠. 그런데 자신은 여전히 화성인임을 숨기며 숨졸여야 하는 상황에서, 화성에 이용 당하고 입막음 당한 아버지에 대한 것까지 겹치며 이 모든 게 어세일럼 때문이라는 착각에 빠질 지경까지 되어서 순간적으로 어세일럼을 죽이려 들었죠.
레예가 화성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
이 장면에서 레예는 지금까지처럼 쿨하거나 차가운 이미지가 아닌, 격정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죠.
"네가 화성인이건 지구인이건, 그건 내 알바 아니야."
이나호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건, 지금껏 화성인과 함께 싸웠던 거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죠.
결국 레예는 이나호가 쥐어준 총을 잡았고, 그 다음에는 지금껏 자신을 가리고 있었던 후드를 벗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진짜 아군"이라는 느낌으로 활약하죠.
화성인 태생이라는 것과, 지금은 지구인 병사라는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결국은 지구인 병사임을 택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슬레인 까기에 열중한 나머지 잊어버린 게 있는데 사실 이 장면의 레예랑 똑같은 이벤트가 슬레인에게도 일어납니다.
여기서 지구군 병사는 "꼼짝마라 화성인!"이라고 했고, 슬레인은 그에 대한 부정은 없이 대응했습니다.대체 권총으로 뭘 하려던 건지는 모르지만
슬레인 역시 자신은 지구 태생이고, 현재는 화성 군인이라는 정체성의 혼란이 갈수록 가중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이젠 슬레인은 결코 지구인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죠.
그리고 등장한지 20초만에 퇴장한 이 화성인 병사도 이나호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지구군에 총을 겨눴다는 것. 아군에게 총을 겨누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니, 결국은 함께 싸우는 동지였다는 것이죠.
이미 이전부터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서서히 화성 쪽으로 기울고 있었던 슬레인의 마음을 여기서 확고히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레예를 안 까는 건 슬레인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이 다음부터는 진짜 주제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이 쯤에서 끊겠습니다만, 만약 이나호가 진짜로 죽은 것이라면, 2기에서 등장할 주역은 위의 두명일 겁니다.
결국 레예 역시 지구군의 군복을 입고 싸우며 공주를 지켰으니까요. 이것은 레예가 1기에서 보여줄 수 있었던 나름의 성장과정이라고 봐야겠죠. 그리고 이에 대칭되는 임팩트에서 비교가 안 되는 슬레인 역시 확실한 성장(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을 했으니, 결국 슬레인이 2기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될 겁니다.
그럼, 이 두사람의 얘기는 충분하고, 이젠 슬레인의 얘기를 해보죠.
유년기의 끝
슬레인은 작중에서 이미 많이 보여주지만, 꽤 착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물러 터졌죠.
"미안해요!"
스카이 캐리어는 알드노아 미탑재 항공기이기도 하고, 결국 이 다음 장면에서 슬레이프니르의 75mm 기관포에 한대 얻어맞자 바로 뻗었습니다. 요격을 맡았던 캄은 스카이캐리어를 확실히 격추시킬 각오로 총을 쏘고 있었고 자칫 잘못했다간 그대로 본인이 골로 가는 상황에서도 이러고 있었죠.
이 친구의 수난로드는 이제부터 시작.
공주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자, 도리어 트릴랑은 "그년을 안 끝내면 우린 3대가 역적이야!"라고 합니다. 슬레이는 혼란스러운 와중에서 우발적으로 트릴랑을 사살해버리지만, 사실 여기서 꽤나 심각한 내용이죠.
트릴랑은 "난"이 아니라 "우린"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트릴랑이 혼자 벌인 짓이 아니고, 진짜 적은 화성에 있는 상황이었죠. 그게 누군지, 몇명이나 연루된 것인지는 전혀 모릅니다. 즉,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그나마 상황을 해결할 힘이 있을 것이라 믿었던 황제에게 가보지만, 도리어 슬레인이 역적으로 찍힙니다. 이건 뭐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
그렇다고 망명자 아들인 슬레인은 '열등민족'이라고 박대받는 게 일이니 화성 내에서 뭔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믿어도 될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단 이 일을 꾸민 건 자츠바움이었지만, 트릴랑은 크루테오에게 빌붙어 있었으며, 크루테오마저도 어세일럼이 죽자 얼쑤 좋구나 하며 침략을 개시했던 인물입니다. 충분히 의심할 만 합니다. 그로 인해서 일단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닐로케라스를 격파한 문제의 '오렌지색 카타프락토이'를 찾아갑니다.
문제의 오렌지색 카타프락토이와의 만남
일단 이들은 발등에 떨어진 불씨인 헬라스를 잡기 위해 공투를 합니다만, 이 둘은 사실 처음부터 상호간에 신뢰관계 따윈 없었습니다.
이나호 입장에서는 닐로케라스랑 싸울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초를 쳐 자신을 비롯해서 인코와 캄이 끔살당하게 만들 뻔했죠. 그게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상대방은 전쟁 상황에서 적군 병사였구요.
"찾았어! 어세일럼 공주님!"
여기서 의심의 눈초리를 빛내는 이나호.
방금 슬레인의 말은 "공주님이 살아계셨네?"가 아니라 "공주님 여기 계셨구나"입니다. 즉 공주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서 왔다는 거죠. 하지만 이나호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시종인 에델리조가 "공주님이 여기 있다는 게 알려졌다간 암살자들이 쫓아올 것이다"라고 말한 게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공주는 암살당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그것도 화성인이 무장 항공기를 끌고 와선 그 화성인은 공주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이놈, 공주를 죽이려고 쫓아온 거 아니야?"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공주님을 이용할 생각입니까?"
"이용당하면, 곤란하냐?"
이나호 입장에서는 상대방을 떠볼 작정이었겠지만, 이 말이 결정적이었죠. 슬레인은 지구인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화성인도 아닙니다. 벌써 화성에서는 역적으로 찍혔고, 심지어는 "발견 즉시 사살"이라는 명령까지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자연스럽게 뭐든 의심하게 될 상황이었죠.
"이용당하면, 곤란하냐?"라는 말은 "공주를 이용하고 있으면, 지금 공주가 살아있다는 게 알려지니까 문제라도 있나보지?"라는 말로 했겠지만, 이를 듣는 슬레인 입장에선 "내가 붙잡아서, 이용해먹겠다는 데 뭔 상관?"이라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닐로케라스랑 싸울 때에는 아예 닐로케라스 앞에 섰던 적도 있죠.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거의 인간 방패로 써먹은 걸로 보일 지경으로요. 아마 슬레인은 그런 식으로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고, 사실 실제와도 다름은 없습니다.
넌 내 적이다
여기서 슬레인을 아예 죽여버리지 않고 바다에 가라앉혔을 뿐인데, 슬레인은 이나호를 죽였으니 되로 받고 말로 갚는 나쁜 놈이란 논지는 절대 성립하지 않습니다.
슬레인은 "당신은 제 적입니까?"라고 물었고, 이에 이나호는 슬레인을 실제로 격추하면서 "넌 내 적이다"라고 선언했죠. 이는 당장은 죽이지 않았지만 "만약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땐 진짜 죽여버릴 거다."라는 뜻을 담은 말이기도 합니다.(슬레인은 그렇게 이해할 여지가 충분히 있죠) 이 시점에서 이나호는 슬레인에게 선전포고 했고, 설령 어떤 형식으로 만났든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에는 둘 중 하나가 죽게 될 것이란 복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슬레인도 망설임 없이 이나호를 죽일 수 있다는 것도요.
절찬 본디지 타임과 맨몸 대기권 돌파, 그리고 치킨
떡이 되도록 얻어 맞아 떡이 되어 기절한 채 자츠바움의 응급 소환.
그리고 치킨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 하는 대담.
여기서 사람들이 또 오해하는 게, 크루테오가 충신인 것도 사실이지만, 자츠바움 역시 슬레인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그런 짓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8화에서 자세히 보면 크루테오가 점점 분노 게이지를 쌓아가며 슬레인을 몰아세우면서 권총을 들이대는 시점에서 중간에 통신을 꺼버렸죠. 자츠바움은 "이놈 냅두다간 진짜 슬레인을 죽여버리겠네?"하고 바로 디오스쿠리아 파이널 퓨전을 마친 뒤 출동한 걸겁니다. 사실 그 다음에 크루테오가 진상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는지는 모를 일. 하지만 그 상황에서 잘못 되었으면 슬레인은 진짜 천국행 편도 티켓을 끊을 뻔했고, 자츠바움 역시 트로이어드 박사에게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에 구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자츠바움은 슬레인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죠.
정성들여 프리젠테이션까지 만들어서 슬레인에게 친절히 설명해주는 자츠바움.
사실 슬레인이 꽤나 흔들리는 건 이 시점부터입니다. 이전까지는 공주바라기였던 슬레인은 버터 나이프를 자츠바움의 눈앞에 들이대는 모습도 보였었지만, 이 시점부터는 자츠바움에게 동정을 하는 듯한 묘사가 있고, 또한 동조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슬레인은 이 시점까지는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진 않았지만 지금 어디 있는 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 알 길도 없죠. 자츠바움은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었죠. '만약 나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츠바움은 타르시스를 넘겨주며 "저쪽으로 가든지, 내 밑에서 싸우든지. 알아서 하셈. 이걸로 빚은 다 청산한 거임"하고 유유히 떠났죠. 하지만 정작 슬레인은 이전처럼 그저 공주 찾으러, 역적으로 찍히든 총살당할 뻔하든 너는 짖어라 나는 간다 하고 닥치고 비행기 몰고 양륙성을 나가던 이전의 모습이었다면 슬레인은 절대 망설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참이나 망설이고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결국 지구연합군과도 싸우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자츠바움을 도왔죠. 자츠바움은 분명 어세일럼 공주를 죽일 거라고 선언한 상태였는데도 말이죠.
아마 이 때 쯤 되면 슬레인에게 있어서 어세일럼 공주와 자츠바움 백작은 거의 동등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이전이 일방적으로 공주만 바라보고 기대는 어린 아이였다면, 이제는 온갖 시련을 거쳐 오늘에 이르러, 그 나름의 해답을 얻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어른을 보며, 그 어른을 동경하여 자기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한 건지도 모르죠.
무장도 되지 않은 스카이 캐리어를 타고 일단 공주님을 따라가긴 했습니다. 물론 아무 수확도 없이 위의 스크린샷에서 나왔던 그 병사가 권총에 얻어맞고 순직하는 장면을 봤구요.
하지만 이전, 크루테오 성에서 병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총을 쏘는 등 고통을 주는 짓도 마다 않던 슬레인이었지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자츠바움 성의 병사들은 영주 따라 훨씬 더 진보적인지(...) 슬레인의 출신 따윈 뭐 어때 식으로 대응했죠. 그리고 슬레인은 그의 죽음에 더욱 마음 아파 하는 듯한 느낌이었구요.
사실 이 때 쯤이면 이미 슬레인은 공주보다는 자츠바움 백작의 사람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설령 그것까지는 아닐 지라도, 공주님이 죽길 바라진 않지만, 자츠바움 역시 살아남기를 바랐을 겁니다.
"네놈들은 이해 못할 거다. 강제로 주입된 지구인에 대한 선망과 증오가 언제까지고 우리의 영혼을 좀먹으며 사람다운 삶을 빼앗았다. 윤택한 땅에서 풍요롭게 사는 너희가 우리의 마음을 이해할 리가 없어. 증오를 주입당한 원한. 그걸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원통함.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슬레인은 오랜지색 카타프락토이가 자츠바움을 쓰러뜨렸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당장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머뭇거리고 있었죠. 위의 대사 역시 통신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슬레인에게는 전부 들리는 상태였습니다.
"나는 미운 모든 것들을 쓰러뜨려, 증오의 연쇄를 끊겠다!"
이 말이 나왔을 때, 슬레인은 그 때가 되어서야 자츠바움을 구하기 위해 오렌지 색 카타프락토이에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합니다.
이 말이 대체 슬레인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그런지는 저로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자츠바움에 대한 슬레인의 호의는 단순히 잠깐 얘기했거나, 목숨을 구해줬거나. 그 정도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슬레인은 어디선가 자츠바움에게 동조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돕게 만든 거였죠.(자츠바움이 공주를 죽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공주가 눈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에서도 보입니다.
이것은 트릴랑 때와 비슷합니다. 오히려 그 때보다 더 하죠. 단순히 트릴랑은 "공주를 확실히 죽여놓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고 머저리야!"하고 떠들고 당장 공주를 해치우러 뛰어갔을 뿐입니다. 그것을 그 자리에서 총으로 난사해서 죽여버렸죠. 하지만 그 때에는 이런 극도의 분노와 슬픔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울면서도, 결국 못 죽입니다. 그냥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만 하죠.
왜 울었는 지에 대해선 좀 여러가지 생각이 들죠. "왜 죽였어!"하는 듯 발광하며 쏘다가도, 그나마도 제대로 못 맞추고선,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당신을 쏘고 싶지 않았는데"하는 듯하죠. 이거야 제 해석이니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트릴랑 때처럼 망설이지 않고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은 것도 포함해서요. 공주가 코앞에서 벌집에 되어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슬레인은 그저 울기만 하고, 자츠바움이 "여길 쏴야지"하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리켜도, 결국 못 쏩니다. 못 죽이죠.
이 시점이 되면,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슬레인에게 있어서 어세일럼이 소중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존재는, 그녀를 죽인 자츠바움을 죽여버릴 정도로 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존재가 생각보다는 작았던 것인지, 혹은 자츠바움의 존재가 생각보다 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츠바움의 존재는 슬레인에게 가벼운 건 아닐 겁니다.
어쨌든 슬레인은 그렇게 자츠바움의 역사를 반복했습니다. 자츠바움은 어세일럼의 아버지인 길젤리아 때문에 눈앞에서 오를레인이 죽는 걸 봐야했고, 그 딸을 사랑한 슬레인은 자츠바움에 의해서 어세일럼이 눈앞에서 죽는 걸 봐야 했죠. 한 때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었고, 스스로 증오의 연쇄를 끊겠다고 하였지만, 증오의 연쇄는 단지 더 돌아 이젠 슬레인에게 차례가 왔을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츠바움이 했던 말입니다. 자츠바움은 그때에 되어서야 자신들이 지구에 가졌던 선망과 원한이란 게 단순히 주입되었을 뿐이라는 걸 알고 허탈해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원통함이 뼈에 사무친다고 했죠. 엄밀히 말하면 자츠바움은 그 시점에서 누군가가 심어준 가치관을 버리고,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기 시작한 겁니다. 그 결과 지금껏 나온 화성기사들 중 가장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죠.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저렇게 떨지 않고서, 망설임 없이 이나호를 쏜 슬레인 역시 이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껍질을 깨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뒤바뀝니다.
지금껏 감정 표현이 절제 되었었던 이나호는 가장 많은 감정 표현이 나오죠.
반대로 슬레인은 지금까지 굉장히 감정적인 캐릭터였고, 행동도 감정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일체의 감정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이나호에게 "공주님에게 접근하지 마라"라고 경고한 후, 이나호가 총을 들고 자신을 겨누자 망설임 없이 쏴죽여버립니다.
슬레인은, 직전에 자츠바움이 말했던 것처럼 미워하는 것들을 쓰러뜨려 증오의 연쇄를 끊으려 했습니다. 물론 결코 끊이진 않았을 테지만요.
이나호가 말한 '박쥐'라는 표현도 꽤나 어울립니다. 원래는 공주의 편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자츠바움의 편이 되었으며, 아직 자츠바움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한 것도 아니면서(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지 않고서) 다시 공주님을 찾으러 왔으니까요. 그야말로 이솝 우화에서 왔다갔다 줏대 없는 박쥐를 닮긴 했죠.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지난번 이나호가 한 "너는 내 적이다"라는 선언 때문에, 슬레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나호를 죽일 만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실제로 죽을 뻔했고, 만약 이전처럼 어물쩡거리고 있었다간 역관광 당할 수도 있었겠죠. 그리고 지금까지는 선량한 성격 때문에 죽일 기회를 잡고도 못 죽인 적도 있구요. 하지만 이 순간에서 슬레인은 이나호를 죽이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엔 자츠바움이 쓰러졌던 곳으로 향해 걸어가죠. 공주는 이젠 어찌 됐든 좋다는 듯이 내버려두고서요.(유키의 내레이션을 보면 공주를 데려간 것 같긴 하지만)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위를 바라보며 특유의 빛깔을 보여줬던 슬레인의 부적은, 이나호를 쏘는 것을 마지막으로 구석에 처박히며 더이상 어떤 문양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단적으로는 어세일럼과 슬레인의 관계가 기어코 파국을 맞은 것일 수도 있죠. 더이상 슬레인은 공주를 지켜달라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하지만 이 팬던트는 아버지인 트로이어드 박사의 것이라 했죠. 아버지의 영향이란 아들에게 있어서는 커가면서 떨쳐내가는 과정이나 마찬가집니다. 그걸 떨쳐냄으로서 어른이 되는 셈이죠. 혹은 어세일럼에 대한 어린애 같은 충성심은 이제 종말을 고한다는 뜻일 수도 있으며, 더이상 아버지의 행운의 기도에 의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세일럼을 지키더라도 더이상 망설이거나 머뭇거림 없이, 설령 어세일럼을 불행하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자신의 방식이 결국 잘못된 것임을 알고서도 행한 자츠바움처럼) 자신의 맹세를 지키겠죠.
슬레인이 자츠바움의 숨통을 마저 끊었을 지, 아니면 살려냈을 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이나호나 공주보다도 자츠바움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은 아닐 겁니다.
우로부치 표 비극
맨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더 방대하고, 스압에 더욱 두서없는(...) 글이 되었지만, 전혀 제목과 관련 없는 내용만 써갈겼지만, 이젠 좀 제목과 관련 된 내용을 언급하렵니다.
제가 쓰면서도 좋은 비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원래는 선량했고 그 선량함에서 비롯된 행동이 결국엔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바람에, 오히려 악독해진 주인공은 우로부치의 여러 작품에서 등장한 바 있었죠.
"자기 인생을 종쳐놓고, 이젠 남 인생까지 종치려 든다"라고 자조한 레이지의 전례가 상당부분 키리츠구에게 이어지더니, 지금 저 총을 겨누는 장면도 있고, 감독이 아오키 에이인 것도 있고, 망설임 없이 총빵을 놔버리는 장면도 상당히 전작들을 연상시키는 지라...
어쨌든 이 길고 재미 없는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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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부치 본인이 자기 잘못 아니라고 변명하는 거 보면 원래는 그냥 애정 결핍과 이나호와 공주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어리광을 부리게 된 캐릭터 정도였던 모양인데 각본가와 제작진들이 그걸 질투 때문에 총으로 사람 쏴죽이는 성격으로 뒤틀어 놓았으니 전 과연 슬레인을 우로부치표 캐릭터로 쳐줘야할지 참 의문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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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츠바움이 죽음으로써 망설임을 떨쳐낸거죠. 솔직히 전 이나호의 헤드샷 연출이 문제라고 보지 캐락터의 심리묘사는 문제가 없다고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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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네요 슬레인이 어느정도는 치킨백작에게 동조하는거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나호 쏜것도 그렇지만 작중에서 설명이 너무 부족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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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슬레인이 화성 병사 A와 대화하는 씬까지는 화성인과 지구인 사이에서 자신을 저울질 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츠바움을 도와주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개인적으로 그 저울질은 자츠바움이 공주를 쏘는 부분에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슬레인은 자신이 공주를 죽이려하는 자츠바움의 편도, 공주를 빼앗아간 지구 편도 아니라고 생각한 게 아닐런지. 2기가 나오면 슬레인은 타르시스라는 사기 기체도 있고 하니 (아마도 살아있을 듯한) 아세일럼 공주와 함께 행동하고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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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부치 본인이 자기 잘못 아니라고 변명하는 거 보면 원래는 그냥 애정 결핍과 이나호와 공주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어리광을 부리게 된 캐릭터 정도였던 모양인데 각본가와 제작진들이 그걸 질투 때문에 총으로 사람 쏴죽이는 성격으로 뒤틀어 놓았으니 전 과연 슬레인을 우로부치표 캐릭터로 쳐줘야할지 참 의문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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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슬레인이 화성 병사 A와 대화하는 씬까지는 화성인과 지구인 사이에서 자신을 저울질 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츠바움을 도와주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개인적으로 그 저울질은 자츠바움이 공주를 쏘는 부분에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슬레인은 자신이 공주를 죽이려하는 자츠바움의 편도, 공주를 빼앗아간 지구 편도 아니라고 생각한 게 아닐런지. 2기가 나오면 슬레인은 타르시스라는 사기 기체도 있고 하니 (아마도 살아있을 듯한) 아세일럼 공주와 함께 행동하고 있을 것 같네요 | 14.09.23 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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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네요 슬레인이 어느정도는 치킨백작에게 동조하는거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나호 쏜것도 그렇지만 작중에서 설명이 너무 부족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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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츠바움이 죽음으로써 망설임을 떨쳐낸거죠. 솔직히 전 이나호의 헤드샷 연출이 문제라고 보지 캐락터의 심리묘사는 문제가 없다고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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